<깃븐우리절믄날> 젊은 세 지식인과 한 모단걸의 비밀

이야기의 처음과 끝이 있어 감정의 고저를 타며 관객을 사로잡는 공연은 분명히 아니다. 하지만 히라타 오리자의 연극을 번안한 <서울노트>를 비롯해 <과학하는 마음> 시리즈 등 일본 조용한 연극의 특징을 맛 봤던 사람이라면, 그리고 <조선형사 홍윤식>, <소설가 구보씨와 경성사람들>을 비롯해 올해 연극, 영화계에 자주 등장했던 경성의 모단 보이, 모단 걸이 신선하게 다가왔다면, 연극 <깃븐우리절믄날>은 그대에게 ‘참으로 재미진’ 공연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깃븐우리절믄날>이 앞서 이야기 했던 조용한 연극 시리즈나 경성 이야기들에 중심이었던 성기웅의 작, 연출작이라는 것에 다시 한번 고개가 끄덕여진다. 1930년대 과거 습관과 새로움의 시도가 혼재한 혼란 속 경성, 젊은 예술가인 박태원, 이상, 정인택과 이들 사이의 한 여인 권영희가 무대 위에 있다.

현 신세대 백화점의 전신으로 당시 근대의 상징이자 모던 보이들의 주 활동무대였던 미스코시 백화점 옥상 정원, 이상과 박태원의 대화가 맛깔지다. 밖으로 도는 내 여자에게 서방 노릇을 못하고도 개구지게 한판 웃어대고는 ‘이 시대 천재 작가’임을 자처하는 이상과 그런 이상에게 여느 때처럼 차 한 잔을 사며 너그럽게 웃어대는 당대 최고 기대주, 소설가 박태원. 이들은 국제 정서와 국경 사이로 넘쳐오는 신 문학의 물결, 그리고 뛰어난 문학적 소양을 갖춘 카페 여급, 권영희를 이야기 한다.

실상 이 작품은 권영희와 그녀를 마음에 품은 세 지식인의 이야기다. 갓 결혼한 신혼의 박태원도, 다른 남자에게 내 여자를 빼앗긴 이상도, 그리고 시대의 엘리트로 번듯한 직장인으로 살고 있는 정인택에게도 권영희는 지울 수 없는 대상. 하지만 누구 하나 드러내고 이야기 하지 못하는 그들이 공유하는 것은 ‘저마다 무엔가 비밀이 있다는 것’이다.

수면제인지, 비타민인지, 또는 몸에 좋은 어떤 것이었는지 모를 그 약들을 한 움큼 삼키고 뱉어낸 끝에 이들의 관계가, 표면적으로는 또렷해진다. 하지만 ‘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라고 이상은 말한다. 글을 쓰며 먹고 사는 형편 없이 가난한 그들이 좀처럼 빈 하게 보이지 않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예쁜 여자에게 ‘기러기를 날린다’ 든지 ‘고히’를 홀짝이며 ‘도회’를 바라보는 등 그 시대의 우리 말들이 새롭다. 여기에 일본어와 영어, 그리고 프랑스어의 교차는 언어의 ‘소리’를 다양하게 만들어 준다.

하지만 무엇보다 ‘말의 재미’는 쉼 없이 주고 받는 이들의 대화가 가진 치밀한 구성에 담겨 있다. 일상을 이야기 하지만 그것이 담고 있는 수 겹의 오묘한 뜻이 상상력을 자극한다. 안부를 건네는 인사말도, 상대방에 대한 단말의 대구도 ‘그냥’은 없는 법이다.
장과 장 사이, 암전을 채우는 무대 뒤 스크린 영상도 놓치지 말자. 그 시대의 신문들, 그리고 재구성한 기사와 재미있는 그림 등은 다음 장과 연결된다. 한자와 고어가 섞인 화면 속을 세세히 살펴보긴 어렵지만, 한 때 인터넷을 떠돌며 화제를 낳았던 ‘연예십계’는 반가울 것이다.

극과 마찬가지로 정인택과 결혼했지만, 그가 죽은 후 박태원과 다시 재혼한 권영희, 미스코시 백화점에서 ‘날자, 날자, 날아보자꾸나’를 외쳤던 이상 등 실존 인물들의 삶과 문학작품이 허구의 이 무대에서 공존하는 것이 흥미롭다. <소설가 구보씨와 경성사람들>에서도 박태원 역을 맡았던 김종태와 정인택 역의 손진호, 이상의 전병욱, 그리고 권영희 역의 주인영 등 배우들도 탄탄하다.

하지만 <깃븐우리절믄날>이 가진 2시간의 잔잔한 재치를 대중들이 ‘맛의 일품’으로 받아들이기엔 힘들 수도 있다. 그러나 요동치는 무대에 권태를 느껴 ‘무엔가 색다른 얘깃거릴 건져보겠단 그 태도’를 가진 사람에게는 오랜만에 든든한 작품이 될 것이다.
글: 황선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suna1@interpa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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