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아그네스> 누가 이 수녀의 아이를 만들고 사라지게 했는가

희뿌연 연기가 자욱하게 공간을 점령한다. 끊임없이 담배를 피우는 닥터 리빙스턴 만큼이나 관객들은 온몸을 옥죄이는 무언가에 야릇한 긴장감을 느끼는 듯 하다. 수녀 아그네스를 마주한 첫 느낌이다.

자신이 낳은 아이를 목졸라 쓰레기통에 버린 섬뜩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연극 <신의 아그네스>가 실로 오랜만에 대학로 무대에 섰다. 대학로 정미소에서 공연 중인 이 작품에서 25년 전 아그네스 역을 맡았던 윤석화는 2년 만에 연극에 나서며 닥터 리빙스턴이 되었다.

불안정한 환경에서 갇혀 지내던 아그네스가 수녀원에 들어와 살기를 4년. 때때로 손바닥에서 피를 흘리는, 성가를 부르는 청아한 목소리의 그녀는, 더욱 간절하게 믿음을 바라는 원장수녀 미리암에게 기꺼이 믿고 싶은 기적의 존재가 되어간다. 물론, 아그네스가 가진 어린 생명도, 그 생명을 죽였던 붉은 손도 기적의 그것으로 말이다.

하지만 수녀원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을 앞에 둔 닥터 리빙스턴은 다르다. 어린나이에 수녀원에서 죽은 여동생을 통해 믿음에 대한 희망도 바람도 사라진 닥터 리빙스턴은 철저하고도 날카롭게 원장수녀와 대립한다. 그녀에게는 보이는 것이 믿는 것이요, 그것만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실과 기적 사이 혼란에 놓인 아그네스는 기적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녀를 임신시킨 것은 신부님도, 들판의 일꾼도, 혹은 성령의 기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을 믿는가. 생활의 일편에서 조금은 빗겨나 있을 법한 수녀원에서의 삶이기에 더욱 인간과 일생을 지탱해 줄 무언가가 간절히 필요한 것인가.

아이가 죽은 사건을 시작으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밀도 높은 인물간의 대화는 텅 빈 무대 위 덩그러이 놓인 의자 하나가 전부인 무대를 더욱 강하게 응집시킨다. 공연 내내 사라지지 않는 담배 연기는 아그네스에게 거는 닥터 리빙스턴의 최면술과 공간을 울리는 아그네스의 노래 소리의 전율을 더욱 신비하게 만들어 준다.

닥터 리빙스턴의 윤석화와 원장수녀 한복희의 쏘아대듯 이어지는 대사는 막이 올라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익숙해지는 느낌이다. 상대방의 반응에 강하게 자극받는 모습이 아니라 이미 에너지가 충만해 차례대로 대사를 폭발해내는 느낌이 크다.

무엇보다 작품이 공연 될 때마다 큰 관심이 집중되는 아그네스 역에는 올 여름 창작 뮤지컬 <사춘기>에서 강한 인상을 남긴 전미도와 신예 박혜정이 맡았다. 전미도는 맑고 투명한 외모와 목소리로 순수함과 그 이면에 드리워진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탁월하게 표현해 내고 있다. 2시간이 조금 못 미치는 공연 시간은 긴장으로 가득했다. “무엇이 기적인지 모르겠지만,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축복받은 사람이고 나에게 무언가를 남겼다고 생각합니다.” 멈췄던 월경을 시작한 닥터 리빙스턴의 마지막 독백이다.


글: 황선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suna1@interpa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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