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삼봉뎐> 조선 최대 정치 미스터리, 또는 오늘날의 자화상

등장부터 평범하지 않다. 객석 사이를 지나 천천히 줄지어 무대로 나가는 배우들의 입은 굳게 다물어져 있다. 무대에 들어서야 의상을 입고 나서야 그들은 왕이 되고, 신하가 된다. 그 자리에서 거칠게 회백분을 칠하는 배우들도 있다. 이들이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불과 몇 해 전, 조선에서 일어난 미스터리하고 잔혹한 피바람이 일어난다. ‘정여립 역모사건’의 주동자 ‘길삼봉’이란 자를 찾는다는 명목으로 대립하던 동인과 서인의 정치적 모함과 칼부림은 계속되고, 그 사이에서 왕이란 자는 점점 광폭해진다. 이른바 기축옥사. 이 사건으로 그 당시 1000여 명의 선비가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누구인지도 모를 한 명을 색출하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생명을 앗아간 것이다. 하지만 길삼봉이 누구인지 중요하진 않다. 역사적으로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이 인물은 정치적 음모로 탄생한 헛개비란 추측도 있다. 중요한 건 그 시대 도를 넘는 당쟁 속에서 동인과 서인이 길삼봉을 이용해 조정을 쥐고 흔드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선비들의 죽음, 민생의 파탄이다. <관동별곡>으로 잘 알려진 서인의 정철, 동인의 이산해, 선조, 최영경 등 역사 속 실제인물과 기축옥사라는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매향, 갈윽, 임파 등 허구의 인물과 픽션이 섞였다. 목숨과 지위를 건 싸움은 피를 부르고, 그 속에서 싸움을 주도하는 권력자들뿐 아니라 이름 모를 선비와 민초들의 고통을 더욱 커져만 간다. 내분에 휩싸인 조선은 몇 년 후 임진왜란이라는 된서리를 맞는다. 연극은 ‘길삼봉’으로 모함 당해 죽어나가는 선비들의 억울함과 밑바닥까지 내려간 민초들의 울부짖음을 몸짓과 노래로 표현한다. 몸짓은 때론 과격하게, 때론 적막하게 무대를 채운다. 이름 없는 선비들과 백성들은 가면으로 표현돼 그 생명을 조롱 당한다. 답답한 현실에 백성들은 한을 담은 노래 ‘둥둥곡’을 부르며 미친 궁궐에 한탄과 한숨을 보낸다. 이 작품에서 보이는 언뜻 기괴해 보이기까지 한 동작에 서린 비탄은 비단 그 당시 백성들의 고통으로만 해석하기 힘들다. ‘정치란 그리 냉혹한 것’이라고 정철은 되뇌임 또한 옛날 일이 아니다. 연극이 끝나면 배우들은 왕과 신하의 옷을 벗고 떠난다. 회색분을 칠한 민초들 역시 분장을 쓱쓱 지우고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퇴장한다. 극은 끝나지만 냉혹하고 비린 정치와 한숨 어린 민초들의 응어리는 400년 전과 다를 바 없어 씁쓸함을 남긴다. 글: 송지혜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song@interpa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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