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코러스; 오이디푸스> 도발이 새로운 가능성을 꿈꾸게 했다

사람들이 차례로 입장한다. 매의 눈을 가진 한 사내가 무대 한 켠으로 가 웅크리고, 나머지는 의자에 자리한다. 몸을 굽혔던 사내는 긴 옷자락을 들어 올리고 자신의 발목을 내리친다. 짝-짝. 살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날카롭게 귀를 찌른다. 그 소리를 맞추는 앉아 있던 무리의 낮은 구음(口音). 우리는 이제 강철보다 단단한 밧줄에 발목이 묶여 그것이 이끄는 곳으로 향할 수 밖에 없는 처절한 인간과 마주할 것이다. <더 코러스 ; 오이디푸스>(이하 오이디푸스)다.

지난 2500년 간 어쩌면 셰익스피어의 작품 보다 더 많이 무대를 차지했을지도 모를 고전 <오이디푸스>가 또 다시 낯선 충격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하다. 서재형 연출, 극단 죽도록 달린다의 <오이디푸스>는 ‘완벽한 비극성’의 대표로 꼽히는 소포클레스의 작품이 2011년에도 펄덕이며 살아 숨쉴 수 있다는 걸 제시했다.

새로운 자극으로의 안내는 관객들이 텅 빈 객석을 지나 무대 위로 올라갈 때부터 시작된다. 객석을 비워두고 기존 프로시니엄 무대 위에 원형의 무대와 그 무대를 껴 안는 300여 석의 자리를 구성 했다. 가까워진 거리는 무대와 나 사이를 오고 갈 자극을 더욱 농밀하게 만든다.

가리지 않아 그대로 노출되는 수직의 와이어로프(무대 배경을 바꿀 때 사용하는 장치), 뼈대를 드러내고 아득하게 솟은 천장 등 환상의 세계였던 무대 위에 앉고 또 목격하는 것 역시 색다른 경험일 것이다.

이번 작품에서는 무엇보다 적극적으로 공연을 만들어가는 코러스의 모습을 빼 놓을 수 없다. 관찰자나 작품의 분위기 연출에 머무르곤 했던 코러스는 등장인물이 되기도, 극의 분위기를 이끌고 인물의 행동에 반응하고 그를 평가하기도 한다. 그리스 비극에서의 코러스 역할을 충실히 따라내는 무대는 오히려 현대 관객들에게 새로웠다.


코러스들의 합창은 또 다른 대사이다. 그들이 빚어낸 음들은 안정적이고, 또 불안한 화음으로 피아노 선율과 어울려 공간 속에 이미지를 그리고 지운다. 레시타티보라 규정하지 않아도, 새로운 음악극으로 나선 <오이디푸스>에서 이들의 소리는 대사 이상의 의미와 효과를 담고 있다.

신탁의 굴레 속에서 ‘태어나지 말아야 할 자가 태어나고, 사랑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사랑하였으며, 낳지 말아야 할 자식을 낳은’ 오이디푸스의 비극성은 무대 곳곳의 상징적인 장치에서도 꿈틀댄다.

발목을 옥죄어 오는 밧줄은 벗어날 수 없는 굴레다. 천륜을 거스르는 죄인이 바로 자신임을 깨달은 오이디푸스가 울부짖으며 향하는 욕조는 죽음과 탄생의 의미를 동시에 품을 수 있겠다. 양수가 가득 찬 자궁과, 칼에 찔려 죽음을 맞은 마라의 끔찍했던 무덤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그곳에서 오이디푸스는 눈을 찔러 운명에 역행하려던 지금까지의 삶을 끝내고, 철저히 주어진 운명에 생을 맞기는 미천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배우들은 투사처럼 달려든다. 코린토스의 사자, 늙은 양치기 등 배역을 소화해내는 죽도록 달린다의 배우들은 다시 한번 관객들의 믿음을 샀다. 박해수는 최근에 만나기 힘든 선이 굵고 진한 배우로, 오이디푸스를 통해 그의 매력은 폭발했다. 코러스 장 역의 조휘 역시 강약을 조절하며 작품의 균형미를 채우고 있다.

하지만 누구보다 투사처럼 전진했을 사람은 서재형 연출과 최우정 작곡가 일 것이다. “오랜만에 하고 싶은 대로 했다”며 내지른 도발(?)은 또 다른 가능성을 꿈꾸게 했다. 우리 모두.


글: 황선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suna1@interpa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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