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편력하는 두 기사 이야기

하루에 몇 번씩 죽이는
내 안의 두 기사 이야기


세상을 편력하는 두 기사이야기는 돈키호테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고 한다. 21세기 돈키호테?.
늙고 지친 두 노 기사(전무송, 이호재)의 이야기.
처음에는 세상을 편력하는 두 기사 이야기가 어떤 것을 우리에게 보여줄까? 하는 생각에 호기심으로 보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 ‘연극’을 보러 가면 무의식적으로 무엇인가 느껴야 하고 ‘진리’라고나 할까? 하는 피해 의식을 가지고 간 듯 하다. 오늘 극장을 찾은 나는 그런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했었던 것 같다. 왜 그랬을까? 그건 몸의 반응처럼 무대를 보면 자연스럽게 내게 경직된 학생으로 만드는 말도 안 되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곧 나는 몸을 풀고 자연스럽게 보기 위해 노력했던 것으로 생각이 든다.

사막 한 가운데 간이 이동식 숙박업소. 9명의 사람들.
의사(정동환)와 간호사(신현실), 목사(박영재), 여관주인(오길주)과 그의 딸(이오비). 마지막으로 기사 1(이호재)과 종1(전진기) 기사 2(전무송)과 종2(정규수)에서 일어난 죽이는 일. 의사는 환자를 만들어서라도 돈을 벌려고 하고, 목사는 죽을 사람을 찾아 헤맨다.

두 기사의 생존의 법칙.
“우리도 죽이고 싶어서 죽이는 게 아니야.”
“그럼 왜 죽이는 거죠?”
“죽이지 않으면 죽게 되니까”

두 기사의 마지막 선택.
“이제 분별력에는 넌더리가 나. 여행은 끝났어.
이번에야말로 저 아이가 부르면 빤히 들여다보이는 게략에 속아서 침대로 들어간다. 그리고 목을 내줘야지”

그리고 기다림.
“하지만 우린 살아 있어”
“어쩔 수 없지”
“언제까지지?”
“저쪽에서 올 때까지…”
“뭐가?”
“우릴 죽여줄 상대가…”
“올까?”
“기다리는 거지”

이 작품은 9명중 두 명의 기사만 남겨두고 모두 죽어간다. 컵에 독을 넣어 간호사가 죽고, 두 기사는 모든 음식을 먹어 치운다. 이어서 갱정이라도 하듯이 여관집 주인과 의사, 목사, 그리고 자신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종 2마저도 살해된다. 여관집 딸은 스스로 자살하고, 마지막 남은 종 1도 풍차에 돌진하여 죽음을 맞이한다. 사막에 두 기사가 앉아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죽여줄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면서 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두 기사를 보면서 연민의 정을 느낀다. 마지막 순간까지 죽이지 않으면 죽게 되는 세상을 살아와 마지막까지도 죽이게 되는 두 기사. 죽이는 것도 지쳤다고 말하는 두 기사에게서 말할 수 없는 피로감을 느끼게 된다. 언제 두 기사를 죽이는 사람이 올까. 죽이는 사람이 오.기.를.

현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솔직한 모습을 본다. 상대방을 죽이지 않으면 죽어야 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우리는 두 기사에게서 본다. 사회에서의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고찰일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흑백이 명백한 논리가 적용된다는 점에서 솔직히 매력적인 모습의 두 기사는 아니다. 난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지 않는 두 기사였지만 최소한 이분법적인 인간으로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얼마나 살지는 모르지만 내 생애 마지막에 누가 날 죽이게, 파멸시키게 살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으로 공연장을 나왔다.

맹목적인 신뢰는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사랑이라는 말로 포장은 가능하나 그 실체는 맹목적인 신뢰일 수 있다. 그 종들은 과연 무엇을 위해서 주인에게 맹목적인 신뢰를 하고 최후에는 죽게 되었는가. 그것이 신뢰와 사랑 등등의 아름다움의 결론이었던가? 이기적인 두 기사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둘은 다르면서 닮아 있다는 것이 소름이 돋았다. 내 안에 두 기사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세상을 편력하는 두 기사 이야기는 보는 사람 시각에서 각기 다른 생각을 하게 하는 연극이다. 재미적인 요소를 보게 된다면 충분히 재미있는 연극이고, 철학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다분히 철학적인 연극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이 보는 시각대로 변하는 연극. 그래서 이 연극에 정이 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편력하는 두 기사 이야기만이 줄 수 있는 매력은 솔직히 모르겠다. 나열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단지 나에게 두 기사는 매력 없다는 것. 그 매력 없는 두 기사가 내 모습이 아닌가? 하는 섬뜩함.

꼭 한 번 즈음은 봐야 하는 연극을 추천한다면 세상을 편력하는 두 기사 이야기를 추천하겠다. 그 이유는, 똑같은 인간 읽기의 편견을 가지지 않고, 사고의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는 것에 점수를 주는 것이다. 내가 죽기 전에 죽여야 하는 삶의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오늘도 끊임없이 죽여야 하는.. 오늘도 난 열 번, 백 번, 아니 천 번을 죽고 죽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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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준한(인터파크 공연팀 allan@interpa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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