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s 2005 투란도트(1) - 투란도트가 만들어지기까지
작성일2005.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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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란도트 [Turandot]가
만들어지기까지
이탈리아 작곡가 G. 푸치니 최후의 오페라.
오페라 투란도트는 푸치니의 죽음으로 인해 미완성으로 남겨졌다. 그러나 푸치니의 완성된 어떤 오페라보다 뛰어난 일대 걸작에 속한다. 이 작품은 푸치니의 마지막 작품일 뿐만 아니라 그의 창작세계의 정점을 이루는 유작이었다. 투란도트를 작곡했을 때 푸치니는 이미 60대였다. 너무도 유명한 <토스카>와 <라 보엠>, <나비부인>을 포함해서 그는 이미 11편의 오페라를 작곡한 뒤였다. 그러나 1917년과 18년에 각각 초연을 가진 <제비>, <일 트리티코>는 그의 초기 오페라들이 누린 엄청난 성공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게다가 젊은 작곡가와 비평가들로부터는 공격의 대상이 되었으며 푸치니의 오페라의 최고 해석자였던 토스카니니와도 불화상태였다. 그는 목의 통증을 포함해서 악화된 건강으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 따라서 원래 그의 성격의 일부였던 염세주의와 의기소침이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제 예술가로서 그의 삶은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었던 때이기도 하다.
자신의 예술가로서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에 고심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평판이 높던 정기간행물 “문학”지의 편집자로 박식하고 노련한 베니스극장사의 전문가였던 시모니는 1919-20년의 겨울에 밀라노에서 아다미와 더불어 푸치니와 회담을 가졌을 때 18세기 베니스의 극작가 카를로 고치의 10편의 ‘극적 우화들’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몇 년 전 그는 고치에 관한 희곡을 썼던 터라 1760년대 초에 쓰여진 이 우화들에서 고치는 일을 시도했는데, 즉 동방의 동화(아라비안 나이트에서 유래한)와 이탈리아의 코메디아 델 아르테의 코믹한 인물들과의 교접을 시도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이질적인 두 요소의 결합은 한동안 굉장한 사랑을 받았고 그 중에서도 “투란도테(1762년 작)”의 우화는 최고로 인기가 있었다. 이 작품의 반응이 얼마나 굉장했던가는 이 같은 소재를 바탕으로 적어도 20여편의 오페라가 작곡되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베버’는 <투란도테>를 위한 서곡과 부수음악을 작곡했고, 밀라노 음악원에서 푸치니가 작곡을 배운 스승인 안토리초 바치니는 <투란다>라는 오페라를 써서 1867년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 초연을 올렸다.
많은 작곡가의 영감을 자극한 고치의 희곡이 푸치니의 흥미를 끌었고 이 우화에서 고치는 모든 것을 정복하는 진실된 사랑의 힘을 보여주고 나아가 용기와 충성, 자기 희생 및 고통에 굴하지 않는 꿋꿋한 힘을 찬양하는 보편적 주제를 설정했는데, 이런 점이 푸치니의 마음에 강하게 호소했던 것이다. 그에게 <투란도테>는 ‘고치의 모든 희곡 가운데 가장 정상적이고 인간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와 동시에 푸치니의 새로운 길로 진입할 유일한 탈출구라고 생각했다. 푸치니는 시모니와 아다미가 대본 작업에 착수하였고, 고치의 5막 희곡을 3막으로 단축하게 된다. 단순히 오리지널의 압축이나 단순회에 그치치 않고, 순전히 푸치니 자신의 창조인물인 “류”를 삽입하는 등, 주인공의 성격이나 장면 묘사가 완전히 푸치니식으로 변화된 현대적 <투란도트>가 되었다. <투란도트>의 작업에서 푸치니는 독창적이면서도 유니크한 작품을 창조하고 있었다. 푸치니는 <투란도트>를 완성할 때까지 살지 못할 것을 예감이라도 한 것처럼 끊임없이 작업을 독촉하게 된다.
오페라에 착수한 지 1년이 넘은 1921년 9월에 푸치니는 갑자기 2막과 3막을 합쳐 오페라를 2막으로 단축해야겠다는 결심을 알려 대본가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그러나 한 달 뒤엔 다시 원래대로 3막으로 돌아왔다가 그해 겨울 마침내 오늘날의 형식으로 확정되었는데, 즉 1막을 1, 2막으로 분리하고 2막과 3막을 통합해서 3막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푸치니가 가장 고심했던 부분은 제3막의 피날레 부분인 투란도트와 칼라프의 "사랑의 2중창"이었다.드라마 극적 전환점이 되는 이 자기 폭로는 고치의 희곡에는 없는, 순전히 푸치니 자신의 영감에서 나온 것이었다. 또 하나 고치와 다른 새로움은 공주가 카라프의 이름을 알고 나서도 그걸 밝히지 않는 점이다.
"요컨대 이 듀엣에 의해 스토리는 고원한 단계로 올라서리라고 나는 믿네. 이런 식으로 우리는 현재 우리가 갖지 못한 감동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네.."
이것이 푸치니의 신념이었다. 푸치니는 <투란도트>작업 도중에 토레 델 라고에서 비아레기오로 거처를 옮겼는데, 이곳에서 오페라의 제1막을 완성했지만 건강 때문에 거의 7개월 동안 일을 하지 못했다. 1923년 한 해 동안 줄곧 그는 3막에 주력해서 그 해 말경엔 사실상 ‘사랑의 듀엣’과 피날레만 제외하고 오페라의 전곡을 거의 다 완성했다. 1923년 말쯤 그는 목의 통증을 호소했고, 이듬해 가을에 후두암이란 진단을 받게 되었다, 1924년 11월 아들을 동반하고 암 치료를 위해 브뤼셀로 떠나게 되었다.
푸치니는 토스카니니와 화해한 상태에 있었는데, <투란도트>의 세계 초연을 토스카니니에게 맡기고 싶어하는 작곡가의 소망에 따라 1924년 초가을에 이미 토스카니니는 비아레기오로 푸치니를 방문해서 <투란도트>의 음악을 들었으며, 이듬해 봄 라 스칼라에서 초연을 가질 계획까지 세운 터였다. 브뤼셀로 떠나면서 푸치니는 밀라노 역으로 전송 나온 토스카니니에게 "자신의 사랑하는 공주"를 잘 돌봐달라고 거듭 간청했다. 푸치니의 짐 속에는 <투란도트>의 대본들과 문제의 듀엣을 위한 음악 스케치가 담긴 서류들이 들어 있었다.
브뤼셀에서의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심장은 이 같은 부담을 견디기엔 너무 약해져 있었다. 밀라노를 떠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11월 29일 그는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토스카니니가 스칼라의 오케스트라와 더불어 <투란도트>를 리허설하고 있을 때 주세페 아다미가 평소 때의 철칙을 깨고 토스카니니에게 다가와 연습을 중단시켰다.
"죽었어요?"
라고 지휘자는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죽었어요."
아다미의 대답이었다.
토스카니니는 지휘봉을 던지고 자신의 분장실로 달려가 소파에 몸을 파묻고 흐느껴 울었다고 전해진다. (푸치니의 유해는 밀라노로 옮겨져 토스카니니의 가족묘지에 매장되었는데 장례식에선 라 스칼라의 연주자들이 토스카니니의 지휘에 따라 고인의 처녀 오페라인 <빌리> 중의 안나의 죽음의 행진곡을 연주했다. 이탈리아의 모든 국민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무솔리니가 추도연설을 했다. 2년 뒤 푸치니의 유해는 생전에 그가 사랑한 토레 델 라고로 이장되었다)
토스카니니는 이 미완성의 스코어를 지휘해서 푸치니의 마지막 작품을 세계에 발표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지게 되었다. <투란도트>의 장수를 위해 개막공연을 최고로 만들어야 했으며, 푸치니가 남겨둔 스케치(마지막 두 장면을 위한 스케치를 모두 23페이지 정도 남겼다.)를 바탕으로 오페라를 마무리 지을 작곡가도 선택해야 했다. 푸치니의 친구이자 후배였던 프랑코 알파노에게 그 일이 돌아갔다. 캐스팅은 투란도트에 로자 라이사, 칼라프 역으로는 미구엘 플레타, 류 역으로는 마리아 잠 보니에게 돌아갔다.
1926년 4월 25일(일요일)밤 라 스칼라에서 오페라는 드디어 막을 올렸는데, 토스카니니는 푸치니의 오케스트라가 멈춘 제3막 "류의 죽음"다음에 지휘봉을 내렸다. 그리고 관중에게 돌아서서 조용히 말했다. "여기서 오페라는 끝납니다. 작곡가의 죽음으로 인해 미완성으로 남았기 때문입니다." 관객들은 말없이 일어서서 극장을 나갔다. 공연은 엄청난 성공이었다. 공연 도중 관객들은 깊은 감동 속에서 갈채를 보냈으며 "비바, 토스카니니!" 의 함성이 극장을 가득 채웠다. 또한 신문들도 대부분 열광적인 찬사를 보냈지만 푸치니 예술의 새로운 국면을 보여준 이 오페라가 대중들을 당혹케 한 것은 명백했다. 심지어 비평가들마저 이 새로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안달했을 정도였다.
푸치니의 마지막 오페라에서 푸치니는 처음으로 이전의 다른 그의 오페라들에선 따로따로 발견되는 네가지 요소의 통합을 이룩했다. 즉 극적이고 영웅적인 것(투란도트와 칼라프), 서정적이고 감상적인 것(류), 희극적이고 그로테스크한 것(핑,팡,퐁), 그리고 이국적인 것이 바로 그것이다. 푸치니의 이전 오페라들에 비해 <투란도트>가 광범한 적극적, 정서적 영역을 달성할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통합’ 탓이다. 푸치니가 자신의 ‘사랑하는 공주’를 위해 겪어야만 했던 오랜 산고에 대한 보상은 충분히 받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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