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없이 다치고 '굳은살' 생기는 인생을 담아, <미 온 더 송> 이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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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맨 오브 라만차> 등 굵직한 대극장 뮤지컬에서 주로 활약했던 배우 이영미는 지난 4월 출산 후 첫 복귀작으로 소극장에서 열리는 즉흥뮤지컬 <오늘 처음 만나는 뮤지컬>을 택했다. 당시 즉흥 창작 작업이 너무도 힘들었다던 그녀는 이번엔 더 힘든 작업에 뛰어들었다. 전곡을 직접 작사/작곡하고 연기까지 혼자 하는 1인 뮤지컬 <미 온 더 송(Mee on the song)>이다.
 
<미 온 더 송>은 ‘블루 벨벳 라이브 클럽’이라는 곳에서 가수인 ‘미(Mee)’가 뱀파이어 여인 ‘세라’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펼쳐진다. 이영미는 이 공연을 연습하는 동안 아침 일찍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낮 동안 연습을 하고, 저녁엔 아이와 놀아주고, 밤이면 다시 안무실로 달려가 새벽 3시까지 춤을 추는 일정을 소화했다고.  
 
그러나 지난 12일 버스킹 무대에 선 이영미는 조금도 지친 기색 없이 공연을 이끌었고, 여전히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들려주는 노래에서는 두터운 깊이가 느껴졌다. 18년차 배우이자 한 아이의 엄마로서 예측 불가능한 인생을 기꺼이 껴안으며 다져온 삶의 깊이였다. 이제 그녀는 그 깊이를, 살갑고 따스한 위로를 관객들에게 전할 예정이다.
 
Q 이번 공연은 언제부터 준비하셨나요?
처음 그 얘기를 들었던 건 2~3년 전이에요. 연출님이 애딘버러 페스티벌에 가서 여성 1인극을 봤는데, 공연을 보면서 저를 떠올렸다고 하더라고요. 그 공연의 주인공이었던 여자 분은 예전에 창녀 생활을 하셨던 분이었는데, 그 때의 에피소드도 이야기하고, 노래도 하고, 본인의 이야기를 담아서 공연을 했대요. 임신했을 때는 임신한 모습으로, 아기를 낳았을 땐 모유수유를 하면서 공연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여성 1인극을 이야기하길래 좋다고 했는데 생각보다 기회가 빨리 왔어요. 작년 말 즈음 갑자기 “그때 얘기했던 거 내년 8월에 할래?”라고 하는 거에요(웃음). 그때부터 구상을 시작했어요.
 
Q <미 온 더 송>은 이영미 배우의 자전적 이야기가 아니라 뱀파이어 여인의 이야기인데요, 뱀파이어라는 캐릭터는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공연에서 제 이야기를 하는 것 보다는 드라마를 입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수백 년을 살아온 뱀파이어를 떠올렸는데, 정확히 어쩌다가 그 생각이 났는지는 기억이 안 나요. 그 즈음 뱀파이어가 나오는 영화를 몇 편 보긴 했어요. 한 번은 뱀파이어는 아니지만 어떤 사고로 나이를 먹지 않게 된 여자에 대한 영화를 봤어요. 그 여자는 딸이 할머니가 되고 손녀를 낳는 모습을 지켜보며 자신은 30대 초반으로 머물러 있어요. 어떤 남자를 만나도 자신을 열어 보이지 않죠. 젊어 보이지만 많은 것을 알고 있고, 경험도 많으니 미스터리하고 신비한 매력이 있더라고요. 그런 묘한 매력을 가질 수 있겠다, 생각하다가 뱀파이어 캐릭터를 만들었고, 조금씩 살을 붙여서 지금의 대본이 됐죠.
 
Q 각 곡의 작업은 어떻게 진행하셨나요? 예를 들어 ‘굳은살’ 같은 곡은 가사가 특히 좋아서, 어떤 상황에서 쓰셨는지 궁금했어요.
‘굳은살’과 ‘모두 날 비웃어도’는 사실 이전에 써둔 곡이었어요. ‘굳은살’은 제 이야기가 아니라 이웃의 이야기를 듣고 쓴 곡이에요. 아이 엄마였는데, 주변에서 보기 힘든, 영화나 소설에서나 보게 되는 구구절절한 사연을 가진 분이었어요. 그 이야기를 어느 날 아무렇지 않게 툭, 던지시는데…마침 그때 제 손에 상처가 났다가 아물면서 굳은살이 생기고 있었거든요. 그 분의 사연과 겹치는 부분이 있어서 그 곡을 쓰게 됐죠. ‘모두 날 비웃어도’는 <오늘 처음 만나는 뮤지컬> 때 주인공 넘버로 썼던 곡인데 나중에 쓰자고 미뤄뒀었고요.
 
다른 곡들은 (극 중) 상황을 떠올리면서 썼어요. 그 장면을 떠올리면 생각이 나더라고요. 예를 들어 ‘봄날의 크리스마스’라는 곡은 연출님이 이런 상황을 줬어요. 크리스마스를 좋아하는 남자와 수백 년을 살아서 딱히 그런 것에 감흥을 느끼지 않는 여자. 그런데 남자가 기다리지 말고 오늘 크리스마스를 기념하자고 하면 로맨틱하지 않을까? 그래서 그런 상황을 생각하다가 봄이라는 계절이 좋겠다 싶어서 일단 ‘봄’을 붙였어요. 그리고 아이를 데리고 밖에 나가 편의점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는 거에요. 가로수가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을 보는데 가사가 떠올랐어요. 핸드폰은 아이가 갖고 노니까 편의점 사장님께 종이랑 펜을 빌려서 곡을 썼죠(웃음). 그런 식으로 쓴 곡이 되게 많아요. 곡 쓰는 작업은 재미있었어요. 대본이 다 나오기 전에 곡을 다 썼거든요.
 
Q ‘굳은살’ ‘모두 날 비웃어도’의 가사처럼 <미 온 더 송>도 위로와 힐링의 메시지가 담긴 공연이 될 것 같아요.
네 맞아요. 극 중 70% 정도는 뱀파이어 세라의 이야기이고, 결국은 클럽의 가수 ‘미’가 왜 자신이 세라의 이야기를 하는지를 얘기해요. 사랑과 아이에 대한 이야기, 그녀가 처한 상황, 그렇지만 힘을 내서 살아갈 거라는 이야기까지. ‘미’는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그것을 솔직하게 풀어놓을 용기가 부족해 세라 이야기를 빌리는 것이거든요.
 
Q 특히 어떤 분들이 공연을 보시면 좋을까요.
제가 어쨌든 작품의 많은 부분에 관여를 하다 보니, 제가 그동안 여자로서 살아오며 느꼈던 것들이 공연에 많이 담겨 있어요. 아무래도 여자분들이 느끼기에 조금 더 공감되는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이러면 남자 분들이 안 오시는 게 아닐까?(웃음) 그리고 지금 너무 행복하신 분들보다는 마음 한 구석이 조금 비어 있는 분들이 보시면 더 공감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지금 잘 살고 있는건지 모르겠다 싶은 분들이요. 사실 지금 저의 관건은 제가 울지 않고 공연을 하는 거에요. 그래야 관객 분들에게 감동을 드릴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연습을) 할수록 자꾸 마음이 말랑말랑해지네요.
 
Q 아이를 키우며 바쁘게 살다 보면 창작자로서의 예민한 감수성은 무뎌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곡을 금방 쓰신 것을 보면 오히려 반대인가 봐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제 경우엔 그런 것 같아요. 저는 성인이 된 후로 정말 저 하고 싶은 대로 즉흥적으로 살았어요. 만약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계속 그렇게 살았을 것 같아요. 그랬다면 외로움이나 방황, 사랑의 정서는 노래할 수 있었겠지만, 인생에 대해서 정말 깊이 있게 노래할 수 있었을까 싶어요. 아이를 낳고 나서 많이 변한 것 같아요. 좀 더 많은 것들을 보게 됐다고 할까, 그런 부분이 있어요.
 
배우로서는 굉장히 좋은 것 같아요. 사실 음악은 청춘을 노래하는 게 많아서 음악을 하는 분들은 ‘청춘을 잃어버리면 음악을 그만둬야 한다’고 하기도 해요. 나이 들고 결혼을 해도 좀 철없는 분들이 음악을 잘 하는 경우도 있고요. 그런데 배우는 어쨌든 여러가지 삶을 알아야 하고, 많은 분들과 공감할 수 있어야 하는 직업이잖아요. 만약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아이 가진 사람의 마음을 몰랐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배우를 계속 해나가는 데에는 저한테 굉장히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굉장히 힘들긴 하지만.
 
Q 혼자 무대에 서시니 중압감이 크겠지만, 그만큼 무대에 대한 갈증도 많이 풀리실 것 같은데 어떠세요?
그런 건 없는 것 같아요(웃음). 그 시원함을 느끼려면 마음이 좀 가벼워야 하는데 지금은 책임감과 중압감이 너무 무겁거든요. 대신 잘 해내면 그만큼 만족감이 크겠죠. 지금은 그냥 무섭고 떨려요. 이 중압감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Q 대학교에선 정치외교학과를 전공하셨고, 그 후엔 가수로 활동하셨어요. 원래 배우는 계획에 없던 직업인데, 돌아보면 운명같다는 느낌도 드실 것 같아요.  
배우가 된 건 정말 인연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노래하는 걸 너무 좋아해서 가수를 꿈꿨지, 배우를 꿈꿨던 적은 없거든요. 노래가 좋아서 그걸 따라 (인생)그래프의 점을 찍어왔는데, 뮤지컬을 해보니 그게 음악보다 더 재미있었어요. 그리고 제 에너지와도 더 잘 맞더라고요.
 
스물 넷, 다섯 살 때쯤 가수를 준비했는데, 그 때는 녹음실에서 보낸 시간이 정말 많았어요. 정작 사람들 앞에서 노래할 기회는 없는 거죠. 그러니까 굉장히 허무하고, (앨범을) 홍보하려면 방송국에 가서 PD 등을 만나 인사해야 되는데 그런 게 싫더라고요. 근데 공연은 그런 부담이 아무래도 좀 덜 했어요. 두세 달 연습해서 공연을 올리면 또 두세 달 무대에 올라 관객을 만나고, 즐기고, 박수 받고 집에 오는 삶이 너무 매력적이더라고요. 뮤지컬도 재미있지만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너무 재미있었고요. 뮤지컬을 시작하고 나서 몇 년간은 완전 푹 빠져서 지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지금 와서 보면 내가 배우와 더 맞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장르를 만나서 하게 된 것도 되게 감사하고요.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서 하고 있으니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근데 앞으로의 일은 또 몰라요. 이게 천직이니까 끝까지 이 일을 할 거라는 생각은 없어요. 이러다가 어느 순간 안 할 수도 있고, 다른 일이 생기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거고. 어릴 때는 노래를 안 하면 죽는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거든요.
 
이를테면 이런 거에요. 나이 들면 체력이 떨어지잖아요. 술을 매일 먹다가 어느 순간 매일 못 먹게 되죠(웃음). 그런데 그걸 아쉬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돼요. 그래서 30대 후반부터는 산에도 많이 다녔고, 한강에 나가 자전거를 타는 것도 좋아하게 됐어요. 바뀐 거죠. 그런데 그런 변화가 좋았어요. 지금은 제가 이렇게 몰두하는 것이 있지만, 앞으로 그게 바뀐다 하더라도 행복하게 받아들일 것 같아요. 물론 제가 병들고 아픈 변화라면 슬프고 무섭겠지만, 어쨌든 인생은 변해가기 마련이니까.
 
Q 만약 <미 온 더 쏭>같은 공연을 10년 전에 만드셨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왔겠죠?
10년 전이요?(웃음) 아마 에피소드로 1부터 10까지 연애 이야기를 쭉 했을 것 같아요. 어린 남자, 나이 많은 남자, 동갑인 남자…이런 식으로(웃음). 근데 지금의 저에게는 연애라는 것이 그렇게 가치가 크지 않거든요.. 그때는 <섹스 앤 더 시티>가 재미있었는데 지금은 <위기의 주부들>이 재미있어요(웃음). 결혼 전에는 여행을 가고, 거기서 먹은 음식들을 SNS에 올리고, 친구들이랑 방 빌려서 노는 게 재미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걸 보면 헛헛해요. 사람이 완전 바뀐 거지요.

 
Q 지금은 ‘워킹맘’으로서의 고충이 클 것 같아요.  
많죠. 아기가 아직 30개월이 안 됐는데, 이제 말이 트이기 시작했거든요. 제가 일하러 나오면 자기도 좋다고 뛰쳐나왔다가 엄마만 간다는 걸 알고는 뒤 돌아서 울음을 참더라고요. 차마 가지 말라는 말은 못하고. 그런 모습을 보면 마음이 너무너무 측은하고 짠하죠. 그런 걸 하루에도 몇 번씩 겪으니까.
 
가끔은 너무 서러운 거에요. 할 건 너무 많은데 시간은 없으니까. 예전에 <서편제>의 창이나 <조로>의 플라멩코를 밤새 연습할 때는 ‘내가 이거 하려고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안 낳고 있었구나, 싱글로 있기를 잘 했지’ 생각했는데 지금은 애를 낳고서 그보다 더한 걸 하고 있네요(웃음). 이렇게 힘든 걸 지금 했어야 했나, 싶을 때도 있지만 반대로 힘들어서 나올 수 있는 에너지도 있으니까.
 
(관객들에게) 힐링의 메시지를 정말 드리고 싶어요. <오늘 처음 만나는 뮤지컬> 때도 그랬지만 무대에 서는 사람으로서, 어떤 분들에게는 조금 더 나이 있는 선배로서, 제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일지 자꾸 생각하게 돼요. 예전에 록커 같은 역할을 했을 때는 멋있어서, 중성적인 매력으로 어필했다면 이제는 무대에서 멋있는 척 할 때는 좀 지나지 않았나 싶어요. 저 자신도 지루하고요. 그렇다면 관객 분들께 다른 걸 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위로라면 위로랄까, 희망을 좀 드리고 싶어요.
 
Q 남편(김태형 연출)과 함께 이번 공연을 만드시는 중인데, 부부가 함께 하는 작업의 장단점을 꼽는다면 뭐가 있나요.
이번에 공연을 준비하면서 꽤 많이 싸웠어요. 원래 잘 안 싸웠는데 <오늘 처음 만나는 뮤지컬> 때 크게 한 번 싸우고, 그 뒤로 잘 지내다가 이번에 또 울고불고, 짜증도 내고 그랬죠(웃음). 일이 겹쳐 있으니 안 그럴 수가 없더라고요. 서로 너무 가깝다는 게 장점이자 단점 같아요. 만약 다른 연출님과 작업을 했다면 이 정도로까지 솔직하게 말을 막 하지 못했겠죠. 근데 그러면서 얻어지는 것들도 분명히 있으니까요.
 
이번에도 연출님이 욕심을 많이 내서 여기선 춤도 췄으면 좋겠고, 여기선 악기도 연주했으면 좋겠고, 하다 보니 할 게 너무 많아요. 대사가 <헤드윅>의 두 배는 되는 것 같아요. 저에게 참 다양한 경험을 선사하고 계시네요(웃음). 그런데 뭐, 살던 대로 살면 재미없으니까요. 다만 아이에 대한 부담이 커서, 아이가 어느 정도 클 때까지 이렇게 힘든 작업은 당분간 안했으면 좋겠어요(웃음).
 
글: 박인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iapark@interpark.com)
사진 : 배경훈 (Mr.Hodol@Mr-Hod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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