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도 슈퍼맨이 될 수 있는 작품, 만들고 싶어요” <더 헬멧> 작가 지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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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가리고 찍어도 될까요?” 시리아 전쟁과 한국 민주화 운동 이야기를 묵직하게 그려낸 <더 헬멧>의 지이선 작가. 그녀는 사진 촬영 전 특별한 부탁을 했다. 시리아 전쟁에서 발생한 폭격으로 한쪽 눈을 잃게 된 아기, 카림을 응원하기 위해 눈을 가리고 사진을 찍겠다는 것. 시리아 전쟁을 다룬 작품을 집필한 만큼 최근 SNS상에서 번지고 있는 ‘시리아 참상 알리기 캠페인’에 함께하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은 지이선 작가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화두다. 소수자의 평등한 삶을 응원하는 <프라이드>도, 장애인의 인간다운 삶을 그린 <킬 미 나우> 모두 지이선 작가의 손을 거친 작품이었다. 그녀는 이번 작품 <더 헬멧>을 통해 또 다른 약자들의 삶을 그리고자 한다. 바로 전쟁으로 피해를 당한 아이의 이야기를 그린 ‘룸 알레포’, 그리고 민주화 운동에서 비추지 않았던 여성의 이야기 ‘룸 서울’이다. 마음에 와닿았던 만큼 꼭 해야 할 얘기를 하고 싶었다는 지이선. 그녀는 작품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Q. 처음 공연 컨셉을 듣고 어떻게 구현될까 정말 궁금했어요. 하나의 에피소드가 두 개의 공간에서 나뉘어 동시에 진행되는 독특한 형식의 공연이잖아요. 심지어 에피소드도 두 개고요.

김태형 연출과 아이엠컬쳐의 정인석 대표 두 분의 아이디어였어요. 어느 날 에든버러에 가서 트릴로지 시리즈를 보고 와선 ‘우리도 이런 식의 공연을 만드는 건 어떨까’라는 얘기를 저에게 하더라고요. 심지어 방 2개를 붙여서 공연을 만들어 보고 싶다고요. 말도 안 되는 얘기잖아요. 제가 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몇 년 후에 그 일이 현실이 됐고, 제가 투입이 된 거죠. (웃음)

작업에 착수한 후 많은 얘기를 했는데요. 단순히 벽만 세워 두 공간을 나누는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그 벽을 열 수 있어야 극의 의미가 생길 수 있다고 얘기를 했죠. 그렇게 계속 김태형 연출과 서로 아이디어를 나누다 보니 지금의 공연이 만들어지게 됐네요.
 
Q. 소재나 스토리도 의아했어요. ‘룸 서울’ 내용이야 우리에게 친숙한 소재였지만, ‘룸 알레포’의 이야기는 머나먼 국가, 시리아의 얘기잖아요.

사실 오래전부터 전쟁에 대한 관심이 많았어요. 정확히 말하면, 전쟁으로 피해를 본 약자들에 대한 관심이죠. <벙커 트릴로지>를 준비하면서 우연히 시리아 전쟁의 민간 구조대 화이트 헬멧에 대해서 알게 됐는데요. 시리아 전쟁의 피해를 당한 아이들을 구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어요. 어른들 문제엔 항상 아이들이 가장 큰 피해자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더라고요. 그래서 꼭 이 이야기를 다루고 싶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세월호 얘기’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얘기를 다루는 건 아직까지 제 안에서 소화가 안 되더라고요. 모두에게 트라우마처럼 남아있는 사건이잖아요. 비겁한 선택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 먼 곳 아이들의 이야기를 이곳에 데려다 놓은 것 같아요. 어른들의 문제에 아이들이 희생된 건 전 세계의 이야기이기도 하니까요.

‘룸 서울’의 백골단 얘기는 민주화 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태형 연출의 제안이었어요. 저도 알고 있었던 내용이기도 했고요. 시리아 전쟁의 화이트 헬멧과 민주화 운동의 화이트 헬멧을 테마로 묶어서 이야기하면 좋겠다 싶었어요. 두 이야기를 자세히 보면 겹치는 부분들이 많거든요. 시리아 전쟁 역시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반정부군이 생기면서 벌어진 일이고요.
 
Q. 아무래도 형식이 강한 작품이다 보니,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풀어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이런 실험적인 작품을 하다 보면 형식에 드라마가 치이는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에요. 형식에만 맞추다 보면 드라마가 느슨해질 수밖에 없거든요. 탄탄하게 드라마를 구성하는 과정이 정말 힘들었어요. 너무 아파서 몸에 마비가 올 정도였으니깐요.

특히 <더 헬멧> 같은 경우에는 두 방에서 같은 사운드를 공유하고, 함께 대사를 해야 하는 부분들이 있다 보니 타이밍이 중요해요. 대본도 가로로 이단 편집이 되어 있고요. 그러다 보니 한쪽 방의 드라마가 부족하다 싶어 대사를 채우면, 다른 쪽 방의 대사도 다시 고쳐야 하더라고요. 드라마를 살리면서도 싱크를 맞추기 위해 정말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Q. 맞아요. 싱크가 맞아 떨어질 때 정말 신기했어요. 다른 공간에 있던 배우들이 각자의 대사를 이어 나가다가 적절한 타이밍에 서로 맞물리는 지점들이요.

두 방이 함께 맞물려야 하는 대사들이나 사운드는 미리 체크를 해놓고 거기에 맞춰서 조절하는 거죠. 혹시 부족할 경우를 위해 예비 대사들도 만들어 놓기도 했고요. 무엇보다 무사히 공연이 이뤄질 수 있던 건 배우들의 부단한 노력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상대에 따라 호흡이 다르다 보니, 전 배우들이 모든 감각을 열어놓고 연기를 해야 했거든요.
 
Q. 동시대 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 <1987>이 같은 시기에 개봉을 한 만큼 관객들의 관심이 더 뜨거웠어요. 특히 ‘룸 서울’은 영화보다 여성 중심의 서사가 잘 드러나 있어 좋았다는 반응들이 많더라고요.

저는 아쉽게도 아직 <1987>을 보지 못했는데, 주변에서 얘기를 많이 해주시더라고요. 그건 작정하고 만든 거예요. 여성이 입체적이고 중심인 서사의 작품들이 많이 없는 게 사실이잖아요. 항상 여성 캐릭터들은 수동적인 존재, 창녀 아니면 성녀로 대부분 그려졌죠. 그래서 여성이 주인공인 액션물을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처음에 얘기했던 건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 같은 장르물이었어요. 민주화 운동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 있게 집중하면서 보길 바랐었거든요. 보는 분들도 운동이라는 것이 얼마나 훌륭하고 가치 있는 것인지를 느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죠. 그래서 액션 장면도 상당히 난도가 높아요. 기존 남자배우들의 액션씬의 수위 이상이죠. 그런데 네 여배우가 정말 죽을 것 같이 힘들다고 하면서도 ‘언제 이런 역할을 해보겠어’라면서 씩씩하게 버텨주더라고요.

가장 진보적인 운동 안에서, 지워졌던 여성의 이름을 두드러지게 만들 수 있는 건 공연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요. 여성이 중심이 되는 서사를 보고 자란 세대들은 여성에 대한 인식 자체를 바꿀 수 있다고 믿거든요. 제가 자주 하는 얘긴데, 여자는 슈퍼맨을 보면서 자신이 슈퍼맨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 해요. 슈퍼맨은 남자니깐요. 남자들은 자신들이 슈퍼맨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시늉이라도 하지만, 여자들은 보자기를 두르는 순간 제지를 당하죠. 항상 주인공 서사에서 밀려왔던 여성이라는 존재에 대해 지금이라도 공연을 통해 다시 한번 들여다봤으면 좋겠어요.
 
Q. 여성 중심의 서사에 대한 관심은 언제부터 생기기 시작한 건가요?

처음부터 제가 여성 중심의 서사에 관심이 있던 사람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제가 아주 오래전부터 여자라는 이유로 겪어왔던 차별들을 시간이 지나고 어린 친구들이 똑같이 겪고 있는 걸 보는 순간에 충격이 오더라고요. ‘왜 나는 이런 것들이 차별, 희롱, 혐오라고 생각하지 못했지?’ 과거의 나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시간이 흘러도 달라지지 않았던 거에요. 그때 마침 여러 좋은 작품들을 만나게 됐어요. 여성, 나아가 약자라는 존재에 대해 서서히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됐고, 여성 캐릭터를 어떻게든 입체적인 인물로 만들려고 노력을 하게 된 거죠. 여성이 입체적으로 그려지는 캐릭터를 계속 보여줘야 사람들이 여성을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다고 믿거든요. 그래야 젠더에 대한 구분, 그로 인한 차별도 사라지고요.

사실 이번 작품을 하면서 ‘룸 알레포’도 아예 젠더의 구분이 없는 작품으로 하려고 했었어요. 헬멧 A가 고정으로 맡고 있는 ‘아이’ 역할을 모든 배우가 돌아가면서 하는 걸 구상했었거든요. 근데 그렇게 되면 모든 배우가 대본을 통으로 외워야 하는 상황이 되더라고요. 한정된 시간에 그렇게 하긴 어려웠어요. 대신 여성, 남성의 성별이 뚜렷하지 않게 만드는 차선의 방안을 택했죠. 만약 재연이 돌아오게 된다면 꼭 처음에 생각했던 세팅으로 가져가 보고 싶어요.

Q. 약자의 이야기가 설득력 있게 그려지기 위해선 스토리를 잘 구상하는 것도 중요하잖아요. 평소 창작 작업에 있어서 영감은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아무래도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많이 찾아요. 사람을 통해서만이 아니에요. 의아하다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저는 저랑 함께 사는 고양이를 통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많이 달라졌어요. 우연히 길에서 구조한 고양이가 인연이 되어 제 가족이 됐거든요. 말도 하지 못하는 조그만 존재가 저와 소통하려고 노력하는데, 정말 신기하더라고요. 많은 영감을 받았어요. 놀라운 경험이었죠.

그때부터 뭔가 작은 것들 것들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고, 여러 카테고리가 생겨나게 됐어요. 대화를 통해, 혹은 고양이와의 관계를 통해 느낀 하나의 질문에 꼬리를 물고 물다 보면 점점 끝에는 약자에 대한 관심으로 귀결되더라고요. 그래서 약자의 이야기에 계속 관심을 갖게 되는 것 같기도 하고요.
 
Q. 작가의 꿈은 언제부터 키우게 된 건가요? 작가로서 글을 쓴다는 건 어떤 의미일지도 궁금해요.

글 쓰는 걸 단 한 번도 좋아한 적이 없어요. 너무 글 쓰는 걸 싫어해요. (웃음) 어렸을 때부터 책 읽는 걸 좋아하고 음악 듣는 걸 좋아하긴 했지만, 뚜렷하게 하고 싶었던 건 없었거든요. 그러던 와중에 고3때 우연히 연기를 전공하던 친구를 따라 한예종에 지원했는데 운좋게 붙게 된 거예요. 대학 입학 전에는 연극을 한 편도 안 봤을 정도였으니, 학교에선 완전 ‘미운 오리 새끼’였죠. 너무 연극에 대해 아는 게 없었으니까요. 그렇다 보니 대학을 다니면서 작가가 될 거라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일반 회사를 몇 년간 다니기도 했고요. 신춘문예에 몇 번 지원해보는 정도였죠. 근데 떨어지고 나니깐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이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큰 공모전에 지원했는데 그걸 붙게 되면서 이 길로 들어서게 됐죠.

행복하지 않은 일이에요. 정말 힘들고 괴로운 일이에요. 그냥 책임감인 것 같아요. 공연을 만든다는 건 저 하나에서 끝나는 일이 아니잖아요. 나이가 들다 보니 이젠 최선의 결과물만 내놓아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젠 최고의 결과물을 내놓아야 할 때죠. 특히나 이런 실험적인 공연은 저희가 최고의 결과물을 내놓지 않으면, 다음 선수가 등장할 수 없어요. 순전히 저의 모든 작업들은 책임감, 죄책감, 그리고 다시 질문하는 과정으로 움직이고 있어요.

Q. 고통스럽고 행복하지 않다면서도 꾸준히 이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다는 건, 이 작업을 통해 느끼는 보람 같은 게 있어서가 아닐까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공연이 계속 유지되고 있는 건 분명히 극장 안과 극장 밖의 삶이 만났을 때 갖는 마법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건 공연만 할 수 있는 일이니깐요. 그걸 단단하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마음이 커요. 적어도 관객들이 공연을 보고 그날 하루, 다음 날의 삶에 조금이나마 좋은 영향을 끼쳤으면 좋겠고, 그 공연을 본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거든요.

그리고 아직 계속 일을 하고 있는 건, 하고 싶은 얘기가 여전히 있어서죠. 그게 저 혼자만 하고 싶은 얘기가 아닌, 주변 사람들과 관객들 모두가 나누고 싶어 하는 얘기라고 생각해요.

Q. 지난해 <모범생들> 10주년 프레스콜에서 ‘연극계의 탕아’가 되고 싶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나는데요. 앞으로 작품을 통해 해보고 싶은 도전이나 목표가 있다면요?

저는 다양성, 차별과 혐오를 배제한 페미니즘에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앞으로도 최대한 성별 구분이 없는 인물 중심의 작품, 나아가 여성 배우들만 출연하는 작품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요. <더 헬멧> 시즌 2가 나온다면 여성만 나오는 극을 시도해보면 어떨지에 대해 지나가는 소리로 태형 연출과 얘기를 해보기도 했고요. (웃음) 제 나름대로 상징적인 결심이기도 하고, 제 성격상 말을 뱉고 나면 지켜야 하는 성격이라 어떤 작품에서든 언젠가 꼭 실천하려고 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좋은 선례를 만든다는 게 정말 중요하더라고요. 그 스타트를 잘 끊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커서 걱정이 많았는데, 실행력이 높은 김태형 연출 덕분에 그런 작업들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런 선례들이 앞으로 공연계에서 좋은 결과를 가져오길 바라고 있어요.

전 공연을 보는 관객들이 정말 훌륭한 공명판이라고 생각해요. 영화나 TV를 보는 거랑은 완전히 다르거든요. 결국 공연은 경험이니까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관객들을 위해 더욱 다양하게 경험을 소비할 수 있게 노력할 거에요. 극장 안과 밖, 객석과 무대가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관객들과 함께 서로 끌어주고 끌려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글 : 이우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wowo0@interpark.com)
사진 : 기준서(www.studiochoon.com), 아이엠컬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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