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연기요? 일단 좋은 삶을 살아내야 해요”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 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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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먹은 야식 때문에 얼굴이 부었다며 촬영 내내 “눈아 커져라” “팔아 길어져라”를 연발하던 그녀, 인터뷰가 시작되자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카리스마를 발산하며 시원시원, 명쾌하고 논리 정연한 대답을 이어갔다. 그 포스(?)에 빠져 이야기를 듣다가 “가르치는 일도 잘 할 것 같다”고 넌지시 말하니, 이미 10년 전 모교(한양대)에 최연소 강사로 부임해 최근까지도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무대 밖에서 만난 배우 정연은 소위 ‘걸크러쉬’라는 말이 어울리는 ‘멋진 언니’였다.  
 
물론 무대 위에서도 그녀는 멋진 배우다. 강인한 여성 캐릭터가 돋보였던 연극 ‘더 헬멧’ ‘벙커 트릴로지’를 비롯해 최근작 ‘스모크’까지, 남자 배우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자 배우가 설 자리가 좁은 공연계에서 그녀가 꾸준히 무대를 지키며 의미 있는 역할을 맡아왔다는 것을 이미 많은 관객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노년의 여성 ‘엠마’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뮤지컬 신작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에서도 그녀의 존재감은 빛을 발한다. 삶의 모든 희망을 놓아버린 엠마가 다시 그 희망을 발견하기까지, 정연이 이어가는 연기는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한 힘을 갖고 있었다.
 
Q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의 첫인상은 어땠나요.
처음엔 대본이 아니라 독회 공연 영상으로 작품을 봤어요. 처음엔 안 할 생각이었죠. 10월까지 좀 쉬려고 했거든요. 근데 영상을 보다가 펑펑 울었어요. 감정을 건드리는 지점이 굉장히 명확하더라고요. 이야기의 얼개나 이음매가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좀 더 탄탄하게 손보면 너무 좋은 작품이 탄생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었어요.    
 
Q 연습 과정에서 그런 부분이 많이 채워졌다고 보시나요.
사실은 아직 재연, 삼연 가기까지 좀 더 탄탄하게 만들어야 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어쨌든 엠마 역을 맡은 배우로서 가장 양보하지 않고 주장했던 것은, 드라마가 반드시 엠마의 시선을 통해 보여져야 한다는 거였어요. 각 장면 안에서의 뉘앙스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엠마의 심상 변화가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했죠. 엠마가 왜 그렇게밖에 살 수 없었는지, 왜 과거를 망각할 수밖에 없었는지, ‘다 내려놓고 죽고 싶어’라고 하던 그녀가 ‘아직 더 배워야 할 게 있어’라고 생각하게 되는 그 모든 변화의 과정이 명확하게 드러나야 이 이야기에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게 명확히 드러나는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했어요. 그러다 보니 첫 장면에서 스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심하게 경계하는 모습이나, 과거 회상 장면에서 처절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좀 더 가져가게 됐죠. 엠마가 그렇게 무너지지 않으면 그녀가 30년간 고립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관객들이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Q 앙다문 입매, 가래 끓는 소리 등 엠마를 연기하면서 표현했던 외형적인 부분들도 인상적이었어요. 그런 부분들은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사실 ‘할머니 연기를 해야지’라는 생각으로 그런 표현을 가져온 게 아니라, 심상에서 먼저 접근했어요. 입을 앙다물고 있는 건 할머니라서가 아니라 내면의 고집스러움을 표현하는 것이거든요. 고집스러운 사람들, 타협하지 않는 사람들의 안면에 가장 먼저 드러나는 게 입을 앙다무는 거에요. 등이 굽은 자세는 의욕이 없는 사람에게서 보이는 특징이고요. 의욕이 없어지면 코어 근육도 무너지고, 똑바로 서기도 힘들어지거든요.
 
배우마다 다르겠지만, 제 경우 의상과 분장을 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거기에 맞는 신체적 표현들이 더 생겨나는 것 같아요. 연습할 때는 이렇게까지 가래 끓는 소리를 내거나 하지 않았거든요. 물론 평소에 사람들을 많이 관찰하고 심상에 따른 안면 근육의 변화 같은 것을 연구하긴 했지만, 연습 때는 그보다 엠마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훨씬 더 집중했어요. 그리고 나서 디테일한 신체적 표현들은 테크니컬 리허설 때부터 부여한 거에요. 제가 갑자기 그러니까 다들 “뭐야~” 하더라고요(웃음).

Q 후반부 장면 혹은 스톤이 등장하는 전체 장면이 다 엠마의 상상이라고 해석하는 관객들도 있더라고요. 그런 해석에 대해 알고 계시나요?
물론이죠. 배우들끼리도 많이 얘기한 부분이고, 그 경계를 명확하게 갖고서 연습을 해본 적도 있어요. 사실 관객들의 의견이 그렇게 여러 갈래로 나눠지는 게 철저하게 의도된 거에요. 저도 연습할 때 이건 엠마의 환상으로 시작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그래야 그렇게라도 절실히 변화하고 싶은 엠마의 마음이, 용서하고 용서받은 다음에 죽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드러나지 않을까 싶었죠. 그걸 두고 정말 열정적으로 토론했어요. 지금의 공연이 그 결과물이고요.
 
Q 함께 호흡을 맞추는 스톤 역 배우(이율, 고상호, 이휘종)들은 각기 느낌이 어떻게 다른가요.
휘종이가 인공지능 로봇같은 느낌을 가장 오래 가져가는 것 같고, 상호는 워낙 몸을 잘 써요. 그래서 초반에 로봇을 표현하는 부분이 기가 막혀요(웃음). 그리고 과거 장면에서의 감정이 되게 진해요. 율이는 표현이 좀 더 휴먼 같아서 마음을 열기가 좀 더 쉽죠. 각기 다른 매력들이 있어요.
 
뮤지컬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 공연 중

Q 지금 이야기를 들으면서 굉장히 논리적, 분석적인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평소 대본과 캐릭터에 접근하는 스타일은 어떤가요?
배우 생활을 하고 경험이 쌓이면서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한 장면에서 배우로서 쏟아낼 수 있는 감정에 더 관심이 많았다면, 지금은 좀 차가운 머리로 전체를 보려고 해요. 그래야 배우로서 소모되거나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오랫동안 무대에 설 수 있을 것 같아요. 왜냐면 나라는 배우, 혹은 내가 가진 감정 연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 있거든요. 그런데 ‘나’라는 배우는 같지만, 내가 맡는 텍스트는 계속해서 달라지잖아요. 그래서 내가 쏟아낼 수 있는 감정보다는 그 텍스트가 하고 싶어하는 말에 더 집중하게 돼요. 이 말을 왜 하지? 이 말들 사이의 의미는 뭐지? 이 말들 사이에서 어떤 감정의 변화가 있었지? 하고.
 
그래서 전체적인 서사와 개연성, 말들 사이의 의미를 낱낱이 찾아보는 것이 지금의 저한테는 더 재미있는 작업이 됐어요. 서사가 엄청나게 탄탄한 작품을 만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으니까, 그럴 때는 내가 최대한 그 개연성을 찾아보려고 하는 거죠. 그리고 나서 거기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감정을 표현하는 거고. ‘여기서 울어야 돼’가 아니라 내가 텍스트에 의미를 부여하고 상대 배우와 관계가 형성된 다음에 그 속에서 예상치 못했던 감정이 나올 때 ‘아, 연기가 정말 재미있구나’를 느끼게 돼요. 그래서 사실 공연도 매일매일 달라져요. 그날의 관객들과 만나서 생기는 공연장에서의 공기와 뉘앙스가 또 다른 엠마를 탄생시키거든요.
 
Q 원래 성악을 배우다가 진로를 바꿔서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다고 들었어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예고에서 1학년 때까지 성악을 전공하다가 그만뒀어요. 노래를 부르는 건 좋은데 그걸로 순위가 매겨지고, 연습을 해야 하니까 재미가 없더라고요. 재능도 없었던 것 같아요(웃음). 선생님이 “넌 성악은 아닌 것 같다, 작곡을 해라”라고 하셔서 그냥 싫어요, 하고 예고를 그만뒀죠.
 
그러다가 제 안의 예체능이 꿈틀거렸어요. 예체능 중에 오랜 훈련을 하지 않아도 도전할 수 있는 게 연극영화과라서 부모님께 딱 한 번만 도전해보겠다고 말씀드리고 특차에 지원했죠. 근데 붙은 거에요. 나중에 교수님께 왜 저를 뽑았냐고 여쭤보니까 그냥 순수해 보였대요. 다들 여기저기서 연기를 배우고 오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애가 교복 입고 나타나서 해보라는 대로 하는 모습이 도화지 같아 가르쳐보고 싶었다고. 그렇게 대학에 붙어서 처음 연기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Q 그리고 나서는 꽤 오랫동안 유학을 다녀왔다고요.
대학에 적응을 잘 못했어요. 다들 학원에서 연기를 배우고 왔는데, 전 아무것도 모르니까 좀 무서웠던 것 같아요. 마침 그때 파리에 유학을 간 친구가 있어서, 거기 놀러갔다가 영국으로 가서 뮤지컬 ‘캣츠’를 봤어요. 완전히 신세계였죠. 근데 어느 순간 그 배우들의 사인을 받으려고 아이들 사이에 끼어서 줄을 서고 있는 내 모습이 보이는 거에요. 내가 이렇게 할 수 있다고? 그게 놀라웠어요. 그 전까지 저는 낯도 엄청 가렸고, 너무 소심한 사람이었거든요.
 
결국 그 일을 계기로 유학을 결심하고 미국에 있는 뮤지컬 학교에 들어갔어요. 거기선 나를 내려놓고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실제로 미국에 있던 6~7년 동안 무언가를 배웠다기보다, 사람이 좀 바뀌어서 왔어요. 난 연극을 잘 모르고, 무대에 서긴 덜 예쁜 것 같고…그런 생각을 다 내려놓고 나라는 사람을 열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죠.
 
Q 프레스콜에서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에 대해 “’더 이상 성장할 게 없지 않을까?’라고 말하는 인간에게 ‘아니, 더 성장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작품”이라고 하셨죠. 배우 생활을 하면서 내가 더 성장할 수 있을까, 라는 회의감을 느꼈던 슬럼프의 시기가 있었나요.   
20대 후반에는 그런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이제 곧 서른인데 어느 곳의 문을 두드려야 될지 모르겠고, 내가 무대에 계속 설 수 있을까? 혹은 더 큰 무대에 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죠. 또 남들은 제가 미국 유학을 그렇게 오래 하고 왔으니 뭔가 큰 작품에 출연할 줄 알았는데 간다(공연배달서비스 간다)라는 극단에 들어갔으니까(웃음). 그런데 전 그냥 주어진 대로 왔어요. 엄청 큰 욕심을 내지도 않았고요.
 
그렇게 공연을 시작하고부터는 꾸준히 다시 불러주시는 분들, 믿어주시는 분들이 계셨고,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극심한 슬럼프의 시기는 없었던 것 같아요. 다만 작품을 연이어 하면서 혹시 내가 나를 패러디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건 위험해, 라고 생각한 시기는 있었죠. 내 감정 연기에 초점을 맞추지 않게 된 이유도 그거에요. 내가 가진 것만 계속 우려먹으면 저도 재미없고, 관객 분들도 재미없을 테니까. 그래서 시선을 돌려서 텍스트를 낱낱이 들여다보기 시작한 거에요.
 
Q 최근에는 여자가 주인공이거나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가 나오는 작품들이 조금씩 나오고 있지만, 그 전까지는 여자 배우로서 아쉬운 점들이 많았을 것 같아요.
정말 많았죠. 작품은 좋아도 나한테는 기능적인 역할만 주어질 때가 많았으니까요. 그래서 이거 너무 기능적이지 않냐고 많이 얘기했지만, 그런 역할을 탈피할 수는 없었어요. 왜냐면 애초에 작품이 그렇게 쓰였고, 그 때는 이런 문제의식 자체가 별로 없었거든요. 그래서 그런 역할을 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캐릭터성’ 밖에 없었죠. 배우로서 살아남아야 했으니까요. 드라마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캐릭터를 좀 더 강렬하게 부여하는 싸움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지금은 그런 의식이 바뀌어가는 걸 많이 느껴요. 또 감사하게도 제가 주체적인 서사를 가진 배역을 많이 맡았고, 앞으로도 많이 맡을 것 같고요(웃음). 결국은 그런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만들어내는 창작진이 많이 생겨야 한다고 생각해요. 또 그런 작품에 기꺼이 힘을 실어주는 제작진이 나타나서 좋은 작품이 많이 탄생하면 좋겠어요. 너무 훌륭한 여자 배우들이 많은데,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기회가 없거든요.
 
Q 중년 혹은 노년이 되었을 때 저렇게 살고 있으면 좋겠다 싶은 롤모델이 있나요?
메릴 스트립, 틸다 스윈튼, 케이트 블란쳇. 그들의 연기만 보고 있어도 기분이 좋고 제 삶이 풍요로워지는 느낌이 들어요. 좋은 연기란 그런 것 같아요. 근데 분명히 그들의 삶이 멋있기 때문에 그렇게 멋있는 연기를 할 수 있는 거라고 믿어요. 그래서 저도 일단 좋은 삶을 살아내야 해요. 그게 (연기에) 다 드러나니까요.
 
앞으로 어떤 배역을 꼭 맡고 싶다는 생각은 없어요. 지금도 충분히 좋은 역할을 맡고 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나이가 들면 좀 더 여유가 생겨서 관객들이 ‘저 배우의 연기를 보면 불안하지가 않아. 어떻게 저렇게 편안하고 여유 있게, 그러면서도 캐릭터에 빠져들게 연기를 할까’라고 느끼는 배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연기하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들의 삶에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어요. 
 
글: 박인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iapark@interpark.com)
사진: 기준서(스튜디오 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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