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택 연희단거리패 30년, 새로운 둥지에서 새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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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7일 저녁 서울 종로구 명륜동의 한 골목 끝자락에서 꽹과리와 징소리가 요란하게 새어나왔다. 연희단거리패가 새롭게 개관한 소극장 30스튜디오에서 개관기념 굿판이 벌어졌기 때문. 김미숙 연희단거리패 배우장은 흰옷을 입은 단원들을 이끌고 비나리부터 씻김굿까지 개관의식을 진행했다. 지폐를 꽂아놓은 돼지머리, 그 앞에 엎드린 사람들, 진한 향냄새까지 요즘 도시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30주년을 맞은 연희단거리패는 그동안 운영해왔던 게릴라소극장을 매물로 내놓고 이 곳 30스튜디오에서 새롭게 출발한다. 갈수록 늘어가는 게릴라 극장의 운영 적자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 30스튜디오는 70석 남짓한 객석을 갖춘 소극장과 배우들을 위한 숙소, 연극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의 장이 될 카페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 씻김굿 의식. 흰 천에 죽은 이의 넋을 담아 밖으로 데려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30스튜디오가 세워진 자리는 원래 흉가가 있던 곳이다. 지난 해 중국인 유학생이 화재로 사망하면서 집은 폐허가 됐고 인근 주민들은 ‘귀신 나오는 집’이라며 접근조차 꺼려했다. 연희단거리패가 죽은 자의 넋을 위로하는 씻김굿으로 독특한 개관행사를 치른 이유도 이 때문이다.
 
김소희 연희단거리패 대표는 “앞으로 연극계는 더 가난해질 텐데 우리 힘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이윤택 예술감독님의 의견에 따라 이곳으로 이사 왔다. 막다른 골목에 있는 집이다. 마지막까지 여기서 생존해보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작아서 상업적인 연극은 할 수 없는 곳이지만 사람냄새, 예술의 향기가 나는 공간으로 만들겠다.”며 앞으로의 포부를 전했다.
 
▲ 일본극단 청년단의 <서울시민>

이날 행사는 개관기념공연의 프레스콜로 이어졌다. 개막작은 일본 극작가 겸 연출가 히라타 오리자의 <서울시민>과 속편 <서울시민 1919>. 히라타 오리자가 이끄는 일본 극단 청년단은 10월 28일부터 31일까지 <서울시민>과 <서울시민1919>를 공연하고 이어서 11월 1일부터 4일, 11일부터 13일, 18일부터 20일까지는 이윤택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이 연출한 <서울시민1919>의 공연이 무대에 오른다.
 
1993년 국내 초연 후 23년만에 한국 무대에 오르는 <서울시민>은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 하기 직전에 서울에 사는 일본인 일가 ‘시노자키’ 가문의 생활을 코믹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정치가나 군인이 아닌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이들의 무의식이 집단화 되면서 식민지 지배의 역사를 만들어냈다는 날카로운 메시지를 담고 있다. 히라타 오리자는 일본이 2차 대전에서 패한 지 7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려는 정치가나 학자가 있다며, 이들의 주장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지 보여주기 위해 <서울시민>을 썼다고 말했다.
 
▲ 히라타 오리자(平田 オリザ) 고마바 아고라 극장 예술총감독. 정확한 한국어 발음으로 1분 분량의 인사말을 준비해 와 취재진을 놀라게 했다.

90년대 일본 연극계에서 ‘조용한 연극’ 붐을 일으키며 극리얼리즘의 붐을 일으켰던 히라타 오리자는 <서울시민>연작 외에도 한국과 일본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강건너 저편에> 등 한국과 관련된 이야기를 꾸준히 다뤄왔다. 30스튜디오 개관행사에 참석한 그는 “정치적인 주장을 하기 위해 예술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윤택 연출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게 예술가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식민지가 나쁘다는 당연한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만든 게 아니라 식민 지배가 사람을 어떻게 비틀어놓는지, 사람이 사람을 지배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기 위해 <서울시민> 만들었다.”고 밝혔다.
 
이윤택 예술감독이 연출한 <서울시민1919>는 히라타 연출의 원작과는 다른 메시지를 던진다. 이 작품은 전편 <서울시민>에 등장한 시노자키 가의 10년 후 이야기로, 1919년 3월 1일 삼일만세운동이 벌어졌던 두 시간 동안 이 가족에게 일어난 일들을 그렸다. 이윤택 연출은 시노자키 가를 일본인인 척 하지만 사실 조선인의 피가 섞여 있는, 조선인의 정체성을 숨기고 사는 인물들로 해석했다. 대본은 한 글자도 수정되지 않았지만 식민지배 역사에 대한 일본인의 책임의식을 강조했던 원작과는 다른 의미를 주는 결말이 만들어졌다.
 
 ▲ 이윤택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

“같은 대본을 보고 이렇게 다르게 해석할 수 있나 싶다. 일본인의 문제가 아니라 순수하게 한국인의 문제로 해석했다. 조선인이 자기 정체성을 어떻게 갖고 살아가느냐 하는 부분을 말하고 싶었다. 대본을 고치지 않고도 이렇게 서로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히라타 선생님이 대단히 구조적인, 과학적인 극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연희단거리패는 개관기념공연에 이어 11월 25일부터 시인 백석의 연대기를 담은 <백석우화>를 선보이며, 12월 23일부터 25일, 30일부터 31일까지는 씻김굿을 공연화 한 굿극 <씻금>을 30스튜디오 무대에 올릴 예정이다.
 
글: 김대열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kmdae@interpark.com)
사진 : 김윤희(www.alstudi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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