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말고는 다른 길이 없었어” 배우 인생 60년 맞은 이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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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60년을 맞은 노배우는 인터뷰 장소에 가장 먼저 도착해 한 구석에 앉아 대본을 읽고 있었다. 어찌나 열중했는지, 사진 촬영을 위해 자리를 옮기는데 대본도 한 몸인 듯 저절로 손에 딸려 간다. 카메라를 앞에 두고도 쉼없이 대본을 외는 모습에 절로 존경심이 들었다. 올해로 82세, 60년간 한 눈 팔지 않고 한 길을 걸어온 어른의 강직한 기운이 느껴졌다.
 
오는 12월 13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개막하는 <세일즈맨의 죽음>은 배우 이순재의 데뷔 60주년을 기념하는 무대다. 이순재는 이번 공연에서 주인공 윌리 로먼 역을 맡아 후배들과 함께 무대에 오른다. 아서 밀러가 1947년 발표한 <세일즈맨의 죽음>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평생 허망한 꿈을 쫓은 가장의 비극을 그린다. 반 세기 이상 수많은 무대에 오른 이 명작과, 역시 반 세기 이상 무대와 브라운관을 오가며 한 길을 걸어온 명배우가 만나 빚어낼 무대는 어떤 것일까. 그 무대를 준비하기 위해, 인터뷰를 마친 이순재는 또 다시 대본을 꼭 쥔 채 서둘러 연습실로 향했다.
 
Q 60주년 기념 공연으로 <세일즈맨의 죽음>을 선택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사실 나는 60주년에 대한 의식은 별로 없었어요. 그냥 쭉 연기를 하는 거지 50주년, 60주년을 중요하게 생각한 건 아닌데 연초에 젊은 교수들이 60주년 기념 공연을 하자고 하는 거에요. 그리고 이왕이면 <세일즈맨의 죽음>을 하자고 하더라고. 내가 이 공연을 1978년도에 한 번 하고 2000년에도 했는데, 60주년을 기념해서 공연을 한다면 아무래도 내가 주연으로 앞장서서 할 수 있는 게 이 공연이니까 하게 된 거에요.
 
Q <세일즈맨의 죽음>을 한국적으로 각색한 <아버지>도 여러 차례 출연하셨어요.
조금 다르긴 하지요. <아버지>는 한국 정서에 맞춘 거였으니까. <아버지>는 스토리를 한국적인 부자 관계에 초점을 두고 바꾼 작품이고, 그 의미 전달은 정확하게 했다고 봐요. 그런데 <세일즈맨의 죽음>에서는 현실과 회상을 넘나들면서 펼쳐지는 연기의 표현력이 더 중요해요. 현실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현실로 넘어오는 장면들을 연기적으로 잘 표현해내는 것이 참 어려운 문제인데, 그런 부분을 이번에 심층적으로 분석해서 표현하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원래 이 작품이 서양의 공연 치고는 굉장히 동양적인 작품이에요. 가족 관계라든지 부부, 부자 관계에 대한 개념이 한국적이거든.
 
Q 벌써 여러 차례 이 작품을 공연하셨는데, 그 때마다 새롭게 발견하시는 것들이 있을 것 같아요.
그렇지. 1978년에 공연할 때는 몰랐던 것들을 2000년에 와서 새롭게 발견하기도 했고. 예를 들면 도시 공해, 환경에 대한 부분이에요. 도시가 커지고 빌딩이 들어서면서 사람과 자연이 설 수 있는 공간은 좁아지고 있잖아요. 그런 도시 공해, 환경에 대한 것들을 경고하는 작품이거든. 인간이 할 수 있는 사회적인 역할도 점점 축소되는 것에 대한 한탄도 담겨 있고. 옛날에는 그런 상징성을 미처 이해하지 못했다고. 또 70년대에는 한참 개발, 성장에 집중할 때라 환경에 대한 인식도 별로 없었고. 작품을 반추할수록 새로운 표현 방법도 자꾸 알게 되고, 별것 아닌 줄 알고 넘어갔던 것들도 다시 재발견하게 돼요.  
 
Q 이 공연이 2016년의 한국 관객들에게는 어떤 메시지를 던질 수 있을까요.  
가족의 의미에 대한 것이죠. 서양이나 동양이나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은 가족이란 말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끈끈한 가족관계를 다룬 작품이거든. 부부관계도 마찬가지고. 부부가 서로 사랑만 할 수는 없잖아요. 살아가면서 갈등, 실패, 좌절이 있을 수 있는데 그걸 어떻게 같이 극복해내는가, 그런 것들이 이 작품에 설명이 돼 있어요.
 
그리고 부모가 아이들에게 갖는 과잉 기대, 그걸 따라가지 못하는 자식의 고통, 여기서 오는 부자간의 갈등에 대한 이야기도 한국적인 현실을 굉장히 많이 담고 있어요. 우리가 절실히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 잘 표현돼 있는 거지. 가장이든, 모녀든, 부자든, 먼 서양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내 이야기로 인식하면서 볼 수 있는 공연이에요. 그래서 이게 명작인 거지. 어느 한 시대나 한 지역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니까.
 
Q 극 중 아버지를 연기하시는데, 실제 선생님은 어떤 아버지였는지 궁금합니다.
나는 뭐 이렇게 집념을 가진 아버지는 아니었고(웃음) 우리 작업이 시간을 굉장히 많이 필요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집에서 애들을 돌보고 살림 걱정을 할 경황이 없었어요. 오로지 일에만 집중했으니까. 한 달에 집에서 자는 시간이 닷새 밖에 안 되는 달도 있었고. (극 중 아버지와) 정반대라고 생각하면 돼요. 애들은 자유방임으로 키우다시피 했고. 그러다 보니까 애들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지.
 
Q 60년 동안 연기를 하셨는데, ‘과연 이 길이 내 길이 맞나’라는 고민을 하셨던 순간은 없나요?
그만둬 봤자 다른 길이 없었으니까(웃음). 돈 버는 능력도 없고 장사하는 재주도 없었기 때문에. 이쪽(연기)에 치우치다 보니 성격도 그렇게 형성됐는지 누구랑 거래를 하고 따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근데 비즈니스를 할 땐 그런 부분에 철저해야 하잖아. 이해타산을 따져야 하고, 어떨 때는 독을 품고 상대방을 넘어뜨리기도 해야 하는데 그런 건 나하고 맞지 않아요. 이거(연기) 외에는 다른 게 없었어.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 행위의 예술성을 발견했기 때문이에요. 60년대만 해도 이 행위를 예술로 인정하지 않았거든. ‘딴따라’라고 불렀으니까. 그런데 앞서가는 나라를 보면 연기를 예술로 인정하고 있었고, 또 그 나라의 배우들을 보면 상당한 수준의 예술적 표현을 한다고 느꼈거든. 그래서 한번 해볼 만 하다고 생각한 거에요. 다들 먹고 살기 힘들다고, 장가가기 힘들다고 했지만 거기서 밀고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생긴 거지.
 
Q 연극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시잖아요. 배우가 무대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것에는 뭐가 있을까요?
무대보다는 그 이전의 연습 과정에서 연기에 대한 기본적인 수련을 단단하게 해두는 작업이 이뤄지는 거에요. 이 연극도 벌써 두 달째 연습을 하고 있는데, 서로 잘못된 발음을 지적하고 정확한 언어표현을 찾아가면서 연기의 본질을 터득해 나간다는 말이에요. 그리고 그렇게 쌓인 기본기를 가지고 TV든 드라마든 다른 매체에 적응을 하면 되는 거지. TV는 연습시간이 많지 않아요. 본질적인 연기수업을 할 시간이 거의 없거든. 그래서 TV만 하던 배우에게 다른 걸 시켰을 때 감당이 안 되는 거야. 근데 연극을 통해서 철저하게 기본기를 다진 사람들은 나중에 영화를 하든 TV를 하든 그 매체의 조건에 맞춰서 하면 되거든. 그래서 연극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거고.
 
그래서 요즘은 연극 출신 배우들이 영화나 드라마도 다 석권하고 있다고. TV에서만 왔다 갔다 했던 중견배우들은 다 밀려났어요. 기본기가 탄탄해야 다양한 역할을 창조할 수 있는데 그러질 못하니까 식상해지고 밀려나는 거지.
 
Q 그 외에 배우가 가져야 할 중요한 자세나 덕목을 꼽으신다면.
배우는 머리에서 연상력이 있어야 해요. 예를 들어 대본을 한 편 읽었을 때 그 전체 상황이 머리에서 그려져야 돼. 언어를 이해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글의 정서나 환경이 머리에서 그려져야 자기 표현이 나오는 것이거든. 그러지 않으면 연출이 가라는 대로 가고, 오라는 대로 오다가 끝나는 거지. 연극이 배우의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연상력에서 나오는 거에요. 같은 동선으로 가더라도 연출이 시키는 대로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배우와 자기 머리 속에 전체 그림을 그리고 가는 배우는 다른 거니까. 그러려면 자기 머릿속에 많은 자료가 있어야 해요. 많이 보고, 많이 읽고.
 
Q 60년 동안 한 길을 걸어오셨다는 것만으로도 젊은 사람의 입장에선 참 대단하다고 느껴집니다. 아직 자기 길을 찾지 못한 젊은이들에게 조언을 해주신다면요.
물론 젊은이들은 아직 방향이 안 잡혔으니까 이걸 할까 저걸 할까 고민하겠지.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관심이나 가능성이 보이는 방향이 생기면 그리로 나가는 거에요. 옛날에는 직업에 귀천이 있어서 다들 산에 들어가서 고시패스 하려고 공부하고 그랬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으니까. 부모가 주는 조건 외에 자기 스스로 행복의 조건을 찾지 않으면 낙오자가 된단 말이에요. 요즘 흙수저, 금수저 하는데 태생적 조건의 차이는 있을 수 있어도 흙수저가 금수저가 될 수 있고, 금수저가 흙수저 될 수도 있는 거에요. 성공의 조건은 구석구석에 있으니까 집념을 갖고, 의지를 갖고 나아가야지.
 
그런 의미에서 자기 자신의 존재 의미를 먼저 알아야 돼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가 있을 거에요. 그 의미가 무엇인지 스스로 찾는게 중요한 거지. 창의력과 의지, 도전정신이 있으면 안될 게 없어요. 연기도 마찬가지고.
 
Q 요즘 시국이 많이 어지럽습니다. 마지막으로 문화계 어른으로서 한 말씀 부탁드려요.
우리 전체가 다시 한 번 자성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과연 나는 지금까지 올바로 살아왔는지, 내가 어느 직위에 있든 공정하게 공평하게 그 직위를 활용하며 살아왔는지. 정치권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권을 말한다면 한 80%는 다 물갈이를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문제는 앞으로 우리의 역량을 어떻게 하나로 모아서 발전시켜나갈 것인가에요. 거기엔 좌도 우도 없다고. 필요하면 서로타협하고 조정할 수 있어야 하고. 이제는 그대들의 미래를 생각해야 하잖아요. 지금 40~50대가 아니라 10~20대의 미래를 생각하고 국가경영을 해야지. 굳건한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어떻게 이들의 미래를 행복하게 꾸려나갈 것인가, 그러려면 지역감정이나 이념 갈등은 다 극복하고 단단히 결속하고, 그리고 나서 우리의 역량을 끌어 올려야지. 우리는 역량 있는 민족이니까.
 
글: 박인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iapark@interpark.com)
사진: 기준서 (www.studiocho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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