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설명

〈암전〉은 공연의 기억이 얼어붙은 물처럼 고여있는 극장과 로비가 주된 공간을 이룬다. 세계는 거대한 극장 로비와 같아서, 우리는 현실과 기억/상상의 중간 지대에서 방황한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구성하는 노숙자의 두편의 독백은 극장 안에서도, 연극에서도 언급되지 못하는, 역사에서조차 누락되고 상실된 우리 인식과 이해의 범위 바깥의 기억/상상이다.
반대급부로, 극중극인 〈잊혀진 부대〉는 극의 내연을 심화시킨다.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하는 연극으로, 어떤 한 부대가 아군에게 유실되면서 정글 한복판에 버려지게 되고, 남은 부대원들이 절망과 공포로 파멸해가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 극중극을 통해, 이 극이 말하고자 하는 전쟁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이는 오늘 우리에게까지 적용된다. 전쟁터 한복판에서 방치된 군인처럼 오늘날 이 경쟁 과열, 양극화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삶은 명분도 가치도 없이 생존을 향해 치닫는다. 이 전쟁의 전사자들이 바로 오늘날의 자살자들이다.
등장인물들은, 노숙자를 제외하면 모두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거나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다. 철학자 바우만은 “현대사회의 불안과 불확실성이 가지는 파장”의 결과로 “악이 도처에 잠복한다.”고 밝힌다. “악인은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 바 없고, 별도의 신분증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며, 따라서, “그 가해자도 피해자도 바로 당신, 나”라고 말한다.
버려진 사람들, 역사 속에서도 이름 없이 지워진 사람들, 자취없이 흘러 다닌 사람들과 그들의 보잘 것 없는 행보는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 혹은 이야기의 시작 전과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 존재하는 극장의 어둠, 곧 ‘암전’처럼 이 극이 응시하고자 하는 부분이다.

줄거리

연극 〈잊혀진 부대〉가 공연되고 있는 극장 로비. 이지혜는 극장 안내원 아르바이트 중이다. 그 공연을 볼 때마다 연극의 비슷한 대목에서 공연 중 뛰쳐나오는 중년 관객 H. 이지혜는 인사를 통해, H가 베트남 참전용사라는 사실도 알게 되고 H는 이지혜에게서 5년 전에 자살한 딸을 떠올린다.
이지혜는 연극 〈잊혀진 부대〉에 출연하는 유부남 배우 민과 불안한 만남을 이어가는데 자신의 연기에 대해 고민하는 민에게 이지혜는 민의 전쟁 군인 연기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며 베트남 참전용사 H와의 만남을 언급한다. 민은 H 집으로 직접 찾아가 H가 겪은 전쟁의 기억에 대해 묻지만 H에게서 전쟁의 기억이나 자취를 찾기가 힘들고 민이 H에게 지난 시간에 관한 이야기를 물어볼수록 H는 딸에 대한 기억에 사로잡힌다.
한편, 이지혜는 매일 극장 안팎을 배회하며 귀찮게 하는 노숙자에게 추운날씨를 피해 극장안에서 잘 수 있도록 해줘왔다. 헌데, 노숙자가 극장안에서 자다가 들켰다. 뿐만 아니라, 이지혜의 이름을 댔다. 이지혜의 일자리가 위태로와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