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설명

사람이 뭉쳐 가족이 되고 가족이 뭉쳐 사회가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사회를 대표할 수 있는 자가 지도자가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지도층이 시간이 흐르게 되면 그곳에서 자신들만 이해관계가 생긴다. 
그들을 만든 시작은 사람인데 그들이 정작 사람의 목소리를 거부하고 명예와 지위를 쫒다보니 진실은 점점 어두워진다. 
지도자가 가장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사람이라는데 정말 그들이 사람을 두려워할까? 어쩌면 가지면 가질수록 두려워지는 건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그동안 쌓아올린 모든 것을 잃는 것이 아닐까 한다. 
진실이란 것은 오이디푸스의 이야기처럼 똑바로 보면 볼수록 위정자가 비극으로 치닫는 경우가 있다. 결국 모든 것을 잃고 장님이 되어 방랑자의 길을 떠난 오이디푸스처럼 우리사회의 위정자들도 그리 될까 두려워 보기 싫은 진실에 눈을 가린다. 그리고 그 비겁함이 이사회 전체를 비극으로 이끈다.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는 다른 측면에서 보면 오이디푸스가 진실을 추구했기에 비극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였기 때문에 비극이 맞이한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오랜 기간 동안 진실을 외면해 왔기에 언제가 터질 진실이 뒤늦게 터져서 생긴 비극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죄악에 대해 책임을 져서 자신이 다스리던 테바이를 위기에서 구하였다. 
어쩌면 인간의 진실이 멀어지고 물질이 중심이 되어버린 지금의 시대가 저주받은 테바이일지도 모르겠다. 위정자들이 끝까지 진실을 외면해 사회가 무너진다면 과연 모든 잘못은 그들에게 있는 것일까? 그들과 더불어 진심을 외면해 그들을 견제하지 못한 우리들의 역시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이이야기에서 바로 그 질문을 하고자 한다. 
보고 싶은 진실만을 볼 것인가? 아니면 진실 그 자체를 똑바로 주시할 것인가? 

줄거리

관객이 바라보는 무대 공간, 그곳에서 사회 지도층들이 세상의 멸망을 영구적으로 막아줄 기둥의 건립을 자축하고 있다. 기둥 건립을 총괄한 위원장, 설계한 설계자, 디자인한 예술가, 이동식 상점을 이끌고 건립 자금과 재료를 제공한 상인, 그리고 기둥의 필요성을 홍보한 알림꾼 등은 서로 자신의 공적을 내세운다. 지도층 소개와 칭찬이 끝나자 위원장은 관객에게 이제 세상의 불안감 따윈 없어졌다고 공언하면서 기념식을 마무리하려 한다.

그 순간, 무대 구석에서 신문지를 깔고 누워있던 노숙자가 일어나 위원장과 그 일행들에게 자신의 이름은 그늘이며 기둥을 직접 만든 기술자 중 하나였다고 주장한다. 그늘은 그들에게 기둥 안의 부품 일부가 고장이나 당장 교체하지 않으면 기둥이 무너질 것이라 경고한다. 

설계자는 노숙자를 비웃으며 노발대발한다. 예술가는 그늘을 동정하지만, 설계자는 그 싸구려 동정을 비난한다. 부품을 제공한 상인 역시 자신의 부품이 부실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알림꾼은 철저하게 방관자의 입장으로 그 상황을 기록한다.

위원장은 그늘에게 기둥 안의 고장을 밝히지 않는 조건으로 재취업을 약속하며 회유한다. 그늘은 그것은 거부하고 기둥의 문을 연 뒤 그들에게 기둥 안의 어둠과 당면한 문제를 직접보라고 호소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늘의 호소를 외면한다. 이에 환멸을 느낀 그늘은 다시 자신이 있던 곳으로 가서 신문지를 덥고 잠을 잔다.

잠시 후 위원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태연하게 준공식을 마치려는 순간, 그늘의 예상대로 기둥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때 위원장은 제작진과 관객에게 그 책임을 돌리고 무대를 떠난다. 설계자, 예술가, 상인, 알림꾼 등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집착으로 기둥으로 달려가 그 위에 매달린다.

무대 공간의 세계가 멸망하려는 찰나, 그늘은 마지못해 일어나 이동식 상점에서 새 부품을 꺼내 챙긴다. 그리고 기둥 위에 매달린 이들에게 정신 차리라고 호통을 친 뒤 기둥 안으로 들어가면서 무대는 막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