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설명

풍림다방이라는 어느 시골다방의 지리적 공간은 현대인들의 삶의 자전 주기를 결정하는 자본이라는 바람에 의해 쉽게 삶의 모든 영역이 가혹하리만치 휘날리다 못해 삶의 질서 지체가 훼손되어버리는 현대인의 삶의 터를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 비극적인 자본 중심적인 사고관이 낳게 될 묵시적인 파국은 오늘날 대부분의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사람들에게는 「풍림다방」 연극을 통해 진행되는 등장인물들의 '돈의 발견'이 단순히 이야깃거리로서의 서사를 넘어서 가치가 자본에 함락당한 현재의 복잡한 자화상을 떠올리게 하여서 매우 불온하게 다가올 수도 있는 결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삶을 살아가면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가장 기본적인 덕이라는 사실 자체가 오래된 사극처럼 빛바랜지 오래고 오히려 사람이 결과라는 효율 중심의 매개로 당당하게 이용당하는 세태를 능력으로 간주하는 공감대를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들의 '돈의 발견'은 기회의 발견인 동시에 더 나아가 기회의 쟁취이고, 이 쟁취를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을 아무렇지도 않게 도모하며 그것을 위해 알리바이를 짜는 범죄를 사회는 이제 성과라는 이름으로 미화하며 현대인들을 길들이기에 이르렀다. 연극 「풍림다방」은 우리끼리 싸우다가 죽음에 이르게 된 교란의 책임을 묻는 작품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란 삶이 뿌리째 뽑혀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해져버린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희생자들을 가리킨다. 이 희생은 대한민국 사회가 현대 산업화의 가파른 절벽을 오르다 도태된 모든 이들의 추락을 상징한다. 정교한 자본주의로 산업화가 옮겨 오면서 강력한 나머지 잔인하기까지 한 적자생존의 동물들에게나 있을법한 후기 산업화의 생존의 법망을 피하지 못하고 추락한 이들은 모두 뿌리째 뽑힌(uprooted)자들이다. 이들이 다시 생존의 링 위에 올라와 살아내고자 발버둥 치는 과정에서 떨어뜨리게 된 모든 삶의 가치들은 사실상 사회의 책임이기도 하다. 사회는 이뿌리 뽑힌 자들이 한 번 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하며 이러한 배려가 가능해질 때 비로소 인간 사회는 진보한다. 극 중에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최소한의 권리와 의무가 주어지는 사회 등록이 결락된 인물, 봉필은 이 모든 사회적 배려의 기회로부터의 이탈을 상징하며 이 이탈은 뼈아픈 가치의 몰락이라는 다른 이들의 알리바이의 도구로 전락하게 되고 희생당하는 도구로 이용당하기에 이른다. 모든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당한 이들에게 '돈의 발견'이라는 기회가 극중 에필로그로 제시되는 '공유'라는 가치로 흐르지 못하고 매우 병리적인 이기심으로 타락한 '자기만의 기회'로 오염될 때 그 사회가 보여주는 파국의 뼈아픈 미래의 질감이 어떠한지를 본 연극은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본 공연은 현대사회에 어떤 기시감을 낳게 하는 '절멸'을 지향하고 기획되었다. 이 다가오는 절멸은 분명히 피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에필로그에 사족처럼 달아 두었다. 분명 현대 사회의 각 구성원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치들이 매 순간마다 우리 앞에서 그 선택으로부터 외면당한다. 그리고 본 공연은 그 외면의 결과가 어떤 어두운 미래를 보여주는지 매우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고 그 방향으로 각색이 되었다. 아울러, 제도라는 시스템의 붕괴 혹은 의도적인 제도의 고립이 보여주는 사회상을 어느 시골마을의 허름한 다방이라는 공간으로 옮겨 그 고립된 제도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뿌리 뽑힌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란, 기본적인 삶을 위해 생활하는 섭생이 아닌 날것 그대로의 야생에 생존하는 축생에 가깝다는 불편한 사실을 국중 서사 아래에 면면히 흐르게 하는 장치를 고려해 두었다. 본 공연이 시작되면 검은 슈트를 차려입은 사람들이 링 안으로 몰아넣은 사람들을 때론 강압적으로 독려하며 싸움을 시키는 장면이 연출되는데 이는 극중 인물인 대성의 꿈 장면을 오프닝으로 삼은 것이다. 이때, 대성의 대사가 매우 의미심장하게 들여온다. “우리는, 우리 의사와 관계없이 물고뜯고 지지고 볶고 살게 되어 있었던 거라고.” 만약에 이렇게 말한 대성의 생각이 맞는다면 인류는 그 기원으로부터 지금껏 그리 크게 변화하지 않은 채 살아온 셈이 되어 버린다. 인류가 발명한 가장 아름다운 발명품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제도들을 고안해 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각 사람의 의견이 무시되지 아니 한 채로 뿌리 뽑힌 자들의 그나마 남아 있는 뿌리에 묻은 흙을 털어내는 잔인한 바람이 아니라, 그들에게 다시 흙으로 그들의 삶이 자리의 뿌리를 드리울 수 있는 제도와 관심이 필요하다. 그 제도와 관심의 흔적들을 아직도 인간 사회에서는 하나의 신화처럼 간직하고 있으니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줄거리

범죄학(Criminology)에서 다루는 용어들 가운데, '링(ring)'이라는 단어는 '한 패'를 이룬 느슨한 조직의 하층민들이 이른바 생존을 위해 범죄에 가담하는 형태를 일컫는 말이다. 극이 시작되면 관객들은 링(ring) 위에서 혈투를 벌이는 한 패를 만날 수 있고 이 격투를 링 밖에서, 그들을 마치 링 안으로 몰아넣은 사람들로 은유될 법한 말끔하게 차려 입은 검은 슈트의 지배 권력들이 그들의 피 눈물 나는 싸움을 마치 예능 프로그램 보듯이 즐기고 있는 장면으로 공연을 처음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이윽고 등장인물들이 드러내는 자신의 내쳐진 삶의 고백을 통해 이 격투는 충분히 멈출 수 있는 것이며 동시에 이 살벌한 링(ring) 위에서의 싸움 자체가 돈으로 상징되는 자본의 멈출 수 없어 보이는 작동원리라는 사실을 통감하게 된다. 즉 링 밖의 사람들로 상징되는 지배 권력과 자본 시스템 그리고 링 안에서 그들의 의도된 외면의 결과로 혈투를 감내해야 하는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을 상징한다. 오프닝이 끝나면 극 중 대성의 간밤의 꿈 장면으로 해설되는 이 링(ring) 위의 장면은 작품의 방향을 완전히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로 등하기에 이른다. 이윽고, '풍림다방'이라는 이느 허름한 시골다방의 철지난 인테리어의 공간에 모여든 이른바, 느슨한 조직의 하층민인 링(ring)의 구성원들이 펼쳐 나가는 우여곡절은 '돈'을 놓고 벌이는 일종의 소셜 잔혹극이라고 칭해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극 전체의 서사는 어느 개인의 범죄로 치닫고 있지만 어느 사회나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들의 범죄의 뿌리에는 이미 그들의 삶의 뿌리 자체를 송두리째 뽑아버린 시스템의 진인함이 그 주요한 추동 원인이라는 점을 적시하고 싶었다. 동시에 개인의 '자본'에 대한 맹종이 야기한 아예 타자(이웃, 친구, 동료)에 대한 블라인드 된 시간이 불러온 파국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극의 마지막 링(ring) 위의 느슨한 조직의 하층민들로 상징되는 세 인물, 봉필과 대성 그리고 숙자의 '어느 봄날 화창했던 하루'를 스틸 장면으로 다루는 과정에서 이 정지된 한 장면이 관객들로 하여금 봉필의 대사처럼, 우리가 비록 가진 것이 없어도 함께 나누어 가지며 같이 살아가는 '충분한 삶'에 대한 돌봄의 전망을 품게 되기를 희망하며 작품의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분명히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연약함이 투영되어 있는 관계로 비애를 품고 있지만 동시에 우리들이 극장 밖으로 이 비애를 옮길 때 함께 동반되는 움직임은 분명히 역사의 진보라는 바퀴어야 할 것이다.

캐릭터

봉필 | 30세 전후의 노숙자, 상당히 더러운 큰 코트를 입고 있다. 전형적인 상거지 꼴이다.

대성 | 40세, 지저분하지만, 양복에 안경까지 쓴, 인텔리적인 분위기의 노숙자.

숙자 | 28세, 다방 레지 아가씨.

도둑 | 건장한 체격에 복면을 쓰고 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