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설명

리진(Lee Jin, 李眞, 리심 李心)은 19세기말 조선 궁녀로 초대 프랑스 공사 빅토르 콜랭과 사랑에 빠져 1893년 함께 파리로 건너간다. 그녀는 아프리카 모로코와 일본 등을 거쳐 1896년 프랑스 공사로 부임한 콜랭을 따라 귀국한 뒤 다시 궁중 무희로 돌아가자 금조각을 삼키고 자살한다. 비운의 삶을 살다간 그녀의 실존여부에 대해서는 여러 설들이 있으나 1890년대 초 조선 주재 프랑스 공사 이폴리트 프랑댕이 쓴 조선 견문록 ‘앙 코레’(En Corée, 1905)‘에는 리진으로 추정되는 인물에 대해

“서울 주재 프랑스 공사관의 젊은 대리공사가 왕궁 소속의 어느 무희에게 반했다. 그는 고종 황제에게 이 여인을 달라고 요구해 프랑스로 데려간 뒤 결혼했다. ‘Li Tsin-Fleur D’ame’(리화심 또는 이심)이란 이름의 이 여인은 프랑스의 관습, 가톨릭 교리에 감탄했으며 서구 언어에도 곧 친숙해졌다. 그러나 유럽 여인에 비해 신체적인 열등감을 의식하면서 원숭이처럼 야위었다. 대리공사는 서울로 다시 부임했다. 그러자 고관인 전주인이 그녀를 데려가 다시 궁중무희가 됐다. 인권에 대한 자각을 경험했던 리심은 금 조각을 삼키고 자살했다”고 기록돼 있다. 
신경숙 작가는 이를 토대로 세밀한 고증과 현지답사를 거쳐 소설을 완성했다. 천애고아로 이름도 성도 없이 상대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리던 궁중 최고의 무희와 프랑스 초대 외교관인 콜랭과의 러브스토리. 보다 정확히 리진을 사랑한 남자들과 그녀가 사랑한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다. 
콜랭. 강연. 홍종우. 모파상까지 리진은 그들과의 관계를 통해 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지만 결정적인 순간 그들은 보호막이 되어주지 못하고, 무대로 소환해 낸 리진의 사랑은 어미와도 같은 명성황후로부터 시작되었듯이, 그녀의 죽음과 함께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조선의 무희에서 파리의 연인으로, 나혜석과 윤심덕보다 한 세대를 앞서 대한제국 최초의 근대여성으로 살다간 리진. 본극을 통해 서구열강의 침탈에 신음하는 조선 땅, 상실의 시대를 가열하게 살다간 예인의 삶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줄거리

춤을 출 때는 ‘서여령’으로, 자수를 놓을 때는 ‘서나인’으로, 동무 소아에게는 ‘진진’으로, 강연에게는 ‘은방울’로 불렸던 리진. 어린 시절 천주교 박해로 부모를 잃고 서씨의 품에서 자란 리진은 블랭 주교에게 프랑스어를 배우게 되며 그가 데려 온 부랑아 소백(강연)과 함께 살면서 가족의 따스함을 느끼게 된다. 5살 무렵 리진은 우연히 서상궁을 따라 궁에 놀러갔다가 명성황후와 만나게 되고, 죽은 자식 생각에 유독 영민해 보이는 아이(리진)를 어여삐 여기게 된 왕비의 총애를 받으며 조선 최고의 궁중 무희로 성장한다. 1886년, 법국(프랑스) 초대 공사로 부임한 조선이라는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우연히 마주친 한 궁녀의 아름다움에 반한 콜랭. 그가 자신도 모르게 프랑스어로 인사하자 놀랍게도 그녀는 유창한 프랑스어로 인사를 받는다. 순간 불같은 사랑을 느끼게 된 콜랭은 관례를 치른 궁녀를 프랑스로 데려가기 위해 차관유치를 조건 삼아 왕부부의 허락을 구하고, 그녀에 대한 남편의 관심을 두려워하던 명성황후가 윤허를 서두르자 고종도 '리진'이라는 이름까지 하사하며 출궁을 허하게 된다. 자유에 대한 갈망과 콜랭을 통해 전략적으로나마 조선에 도움을 주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강연과 정신적인 지주인 왕비, 은인 서씨 등을 뒤로 한 채 2달간의 긴 여행 끝에 프랑스에 도착한 리진은 프랑스 사교계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는데, 이때 조선에서부터 안면이 있던 홍종우를 만나게 된다. 춘향전 등을 같이 번역하자고 접근하는 홍종우가 자신을 사모한다는 것을 알게 된 리진은 그를 경계하고, 유일하게 마음이 통했던 모파상마저 죽자 차츰 이국 생활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 조선을 떠나기 전 프랑스에 가면 결혼을 하겠다는 콜랭 또한 약속을 지키지 않고 급기야 계속되는 유산과 이방인으로서 감내해야 하는 질시 등으로 몽유병에 걸리게 되는 리진. 결국 콜랭은 리진을 위해 조선으로 함께 돌아오지만 홍종우의 흉계로 그녀의 곁을 떠나게 되고 강연도 손가락이 잘리게 된다. 프랑스에서 입던 드레스를 조선에서도 그대로 입는 리진. 결국 그녀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직접 목격한 충격으로 어린 시절 블랭 주교에게 선물로 받았던 불한사전에 독을 발라 먹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프랑스로 떠나게 된 것도 어린 리진에게 배를 긁어 먹여주던 어미 같은 황후의 뜻이었고, 그곳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돌아오게 된 것도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었기에 황후가 없는 궁궐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캐릭터

서씨 | 부유한 역관의 딸로 태어나 양반가로 시집갔으나 4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해 스스로 시댁에서 나왔다. 언문을 읽고 쓸 줄 알며 뛰어난 바느질 솜씨로 궁에서 미처 소화해내지 못하는 침방거리를 도맡아 한다. 지방에서 성균관 근처로 올라온 선비들의 하숙을 치기도 하며 아우 서 상궁을 꼬박꼬박 마나님이라 부르며 존중한다.

왕비 |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 리진을 딸처럼 아끼면서도 고종의 총애를 받을까 고심하는 이중성을 보인다.

서상궁 | 여덟 살에 입궁해 상궁의 반열에 오른 서씨의 동생. 후사도 없이 대비로 봉해진 철인대비전의 수방상궁에서 중궁전으로 자리를 옮긴다.

고종 | (高宗, 1852~1919) 자꾸만 리진에게 가는 눈길이 왕비와 그녀와의 사이를 갈라놓게 한다.

강연 | 말은 못하지만 뛰어난 장악원 악사(대금)로 어려서 함께 자란 리진을 오누이처럼 연인처럼 아끼며, 맹목적인 그 사랑 때문에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아픔까지 감수한다.

리진 | 1869년생, 천주교도로 추정되는 부모를 일찍 여의고 서씨의 손에 맡겨진 뒤, 우연히 서 상궁의 눈에 띄어 궁궐출입을 하게 된다. 프랑스 최초의 외교관 콜랭을 따라 프랑스로 건너갔으나 향수병에 못 이겨 귀국 후 정식 혼인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시 궁녀의 신분으로 돌아가며 1895년 친어미처럼 의지했던 명성황후 시해 직후 26세의 나이로 자결한다.

콜랭 |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 1853~1922). 1886년 조선 초대 프랑스 공사로 부임해 당시 궁녀였던 리진에게 한눈에 반한다. 왕과 왕비에게 간청해 그녀를 프랑스로 데려와 선진 문물들을 배우도록 끝없는 격려하고 기회를 마련해 주지만 끝내 정치적인 악조건과 태생적인 이질감에 지쳐 그녀를 놓아주고 만다.

홍종우 | 조선 후기의 수구파(守舊派) 정객(1854~1913). 조선인 최초로 프랑스에 유학해 법률을 공부한다. 갑신정변에 실패하고 일본에 망명해 있던 김옥균과 함께 상하이로 가, 그곳에서 그를 암살한 후 금의환향 해 입신양명하나 리진에 대한 짝사랑이 지나쳐 그녀를 파멸로 이끈다.

블랑 | 제7대 조선교구장으로 서씨와 함께 조선의 고아들을 친 자식처럼 보살핀다.

소아 | 리진과 절친한 궁녀
기타 모파상, 왕세자. 궁녀, 낭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