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설명

<화진포>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 직면한 여인을 그리고 있다. 여인은 고통이 기억되지 않는 것, 고통당한 자가 사라지는 것을 거부한 채 신분을 버리고 무명씨로 살아남는다. 살아남아 고통을 ‘존재’시킨다. 그것이 소중한 이를 지키지 못한 자의 이별방식, 영원히 끝나지 않는 장례식이다. 하지만 여인의 고통은 설명이 부족하다. 고통 자체만 남겨둔 채 과거를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관객은 여인이 과거로부터 도망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그저 불쌍한 여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다른 한 시선인 남자는 그래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고통에 빠진 여인을 남겨둘 수도 없고 책임질 수도 없다. 누구나 그렇듯, 타인은 타인일 뿐이다.

<화진포>는 해가 지는 시간(1장 sunset)에 시작해 한밤중(2장 midnight)을 지나 해 뜨는 시간(3장 sunrise)에 끝난다. 태양이 사라진 암흑의 시간이 지나 다시 아침이 오는 것처럼 이 여인의 삶에서 사라진 태양이 언젠가는 다시 떠오르기를. 수많은 타인의 고통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밤을 지나 온기로 다시 타오르기를. 누군가는 사라졌지만 누군가는 여전히 존재하기를. 고통스럽지만 끝끝내 기억되기를…….!

줄거리

지난한 삶에서 탈출하듯 화진포를 찾은 남자는 거기서 지갑과 휴대폰을 잃어버린 여인을 만난다. 이름을 물어봐도 대답해주지 않는 여인. 무연한 표정이지만 가면 뒤로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슬픔이 가라앉아 있다. 남자는 여인의 사연이 궁금하다. 철지난 바닷가의 스산스러움 때문인지 그들은 멀리 두고 온 삶으로부터 도망쳐 스스로 낯선 사람, 무명씨가 되기로 한다. 함께 저녁을 먹고 술잔을 기울이고, 결국 잔뜩 취한 채 일출을 보겠다고 다시 바닷가에 앉아있는 두 사람. 그들은 서로의 체온으로 얼음장 같이 차가운 밤을 버텨낸다.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있지만 마침내 깊이 묻어놓은 슬픔이 스멀거린다. 여인은 고백한다. 잊지 않기 위해 잊히는 삶을 선택했다고. 온몸으로 고통을 기억한 채 살아가겠다고. 감히 위로조차 할 수 없는 여인의 고통을 어루만지며 두 사람의 차가운 밤이 지난다. 드디어 해가 떠오르고 새로운 태양 아래 어설프게 춤추던 그들은 마침내, 사랑이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서로의 인생을 향한 위로의 입맞춤을 나눈다. 하지만 남자의 마음과는 달리 여인은 더 먼 곳, 남자가 닿을 수 없는 어떤 곳으로 이미 떠날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돌아가야 할 곳이 있는 남자의 선택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