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설명

연출 글

꼬부랑소시지도 엄연히 소시지다!

인간들이 갈수록 너무 영악해진다. 삶의 경륜이 짧은 10대 20대가 ‘돈’을 알아도 너무 빨리 너무 정확하게 안다는 느낌이 날 무섭게 만들고, 사회를, 문명을 알아도 어쩜 그렇게 영악하고도 현명하게도, 그리고 얼마나 많은 양의 정보를 순식간에 통으로 제 머리에 쏟아 붓고는 제 것인 양 하는지 질릴 정도다. 10대 20대가 이 지경인데 그 윗세대를 말해 무엇 하랴!그래서 나는 현대도시문명이 가진 소위 ‘사회적 존재’를 희롱하고픈 앙심에 이 연극을 한다. 천지난만함이 우둔함으로, 계산 없는 솔직함이 무식함으로 읽히는 사회성을 혐오하고 저주하고자 이 연극을 한다. 사회적 룰을 믿고 존경하면서 그 룰을 자기도 모르게 이용할 뿐 아니라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면서 도시의 더러운 공기를 폐활량을 늘여 흡입하는 우리 자신이 서글퍼서 이 극을 만든다.
원래 인간이 이랬겠는가! 그렇게 되도록 조장하는 환경이나 탓해야지,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환경의 피조물이므로.


작품소개

<서울소음>의 모든 인물은 소외와 고립이 제공하는 공허와 삭막함에 시달린다. 주인공 ‘기수’는 뷔히너의 <보이첵>의 주인공 보이첵이 현재 여기 되살아 온 듯하다. 그는 실존적, 부조리적 존재의 터널을 지난다. 그의 동생 ‘대수’는 낙담 속에 망연자실하여 목적 없는 일상을 멍하니 되풀이하기만하는 체홉 극의 이바노프나 아스트로프와 닮았다. 어찌 보면 이 형제는 셈 셰퍼드의 <True West> 속 형제와 먼 친척 같아도 보인다. 한편 근거 모를 유희성에 휩싸인 ‘클레오파트라 선장’은 유희자체가 삶의 목적으로 보인다. 여기에, 가지지 않아도 좋을 열등의식을 무마하려 괜한 폭력을 쓰면서 괜한 ‘똥폼’을 잡느라 시간을 죽이는 ‘도인’과 천진난만해서 도대체 멍청하게만 보이는 ‘아름’이 나오는데 이 둘과 선장 또한 주인공과 같은 운명이다. 도시소음에 짓눌린 채, 그 소음의 정체도 모른 채 환경에 잡아먹히는 희생양들이다.
작품은 주인공 기수가 정신병원에서 퇴원하면서 그의 행적을 따라가는 줄거리를 따라가는 듯하지만, 곧 줄거리나 이야기 꺼리를 포기하고 또 상식적인 사회성도 거부한 채 그 자체만의 연극적 환경을 마련하는데 집중한다.

줄거리

신비롭고 사랑스러운 기수는 오랜 기간 동안 수차례에 걸쳐 정신병원 출입을 해왔다. 지금 막 그는 정신병원에서 퇴원해 세상에 적응하려는 참이다. 의사의 처방전을 착실히 따르는 것만이 형을 정상인으로 만들 수 있다고 궅게 믿는 동생, 대수와 함께 기수는 살게 된다. 동생과 함께 서울에서 사는 것이 매우 즐겁지만 약간은 겁이 나기도 한다. 서울에 도착한 그는 다양한 색깔과 모양, 그리고 온갖 잡음들에 휩싸이게 된다. 우연히도 기수는, 남자친구에게 길에서 폭행당하고 있는 섬 소녀 아름을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매력을 느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아름은 기수가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퇴원 후 부터 스스로의 방식으로 자기의 병과 싸우기 위해 더 이상 약을 먹지 않고 버티는 기수에게 현실은 힘겹기만 하다. 동생과 크게 싸운 뒤, 기수는 아름의 집으로 들어가 함께 살지만 약물치료를 중단한 기수에게 환청과 환각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