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설명

자본의 논리 속에서 기록상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살게 된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 과거의 존재를 삭제시킨다는 것은 곧 ‘정체성’과 관련되어 있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빠른 속도로 누군가가 되고자 애쓴다. 그런 점에서
누군가가 된다는 것은 결국 생존의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 개인이
원하는 것일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한 인간 안에서의 소용돌이치는 내면의
불안, 결심과 무너짐, 정체성의 혼란을 본 연극은 사이키델릭한 상상력을 통해
가져오고자 하였다. 어쩌면 계속해서 이 세계에 출현할지 모를 또 다른 ‘증발들’에
대해, 개개인이 닿고자 하는 이후의 ‘나’와, 건축하고자 하는 이상적 세계에 대해

상상해보고자 하였다.

매력적으로 다가온 것은 '밤 이사'였다. 한 사람을 삭제시키고 다른
사람으로 리셋 시켜준다는 점이었다. 이사의 표현은 밧줄로 하였다. 또, 인물마다
“고유색이 새겨진 밧줄“이 있고, 이치로는 그것을 자신의 세계와 연결해 이사를
돕는다. 여기서 밧줄은 개인의 아이덴티티이자 생명(탯줄)과 삶의 시간을
상징한다. 밧줄의 길이와 굵기를 인물마다 달리하며 인물이 살아온 삶의 짐들을
가시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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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의 배경인 환락의 도시, 즉 극장 공간에 관해서는,
불빛이 꺼지지 않는 도시를 관객이 다각도로 느낄 수 있도록,
극장의 관객도 배우도 마치 그 거리의 한 사람과 같은 경험을 구현하고 싶었다.

조명은 LED 조명으로 극장 전체를 애워감싸며 도시의 화려한 간판들을 상징화
하였고, 배우들은 1층과 2층을 오가며 관객들 사이를 분주히 배회하였다.
누군가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소거시켜 꾸역꾸역 살아가려 한다는
걸 나타내고 싶었다.


그래서 관객이 몸을 틀어서든, 고개를 돌려서든 극 중 인물들을 직접적으로 보려는
노력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사방에서, 파편처럼 인물들을 등장시켰다.

줄거리

도쿄 신주쿠의 가부키초. 아시아 최대의 환락가라 불리는 곳. 
'이치로'는 이곳에서 밤이사 업체를 운영한다. 고객이 새로운 사람으로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 그리고 증발 이후의 삶까지 책임지려 늘 고군분투한다.

한편 ‘메구미’는 이곳 뒷골목에서 24시 식당을 운영한다. 
이치로가 보낸 증발자들을 맞이하며 그들의 정착을 돕는다. 
그리고 매일 향을 피우며, 누군가를 기다린다.

메구미의 식당에서 '린'은 증발 후 십 년 가까이 일하고 있다. 린은 종종, 검은 그림자를 본다. 이곳을 집처럼 드나드는 '켄'은 이십 년간 증발한 상태로, 청소노동자로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켄이 뜻 모를 꿈 이야기를 한 후로, 린은 기억 속 사람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켄은 돌아가겠다는 결심을 밝힌다.

한편, 이치로에 의해 이사를 택한 '마야'는 완전히 증발하지도, 원래의 삶으로 향하지도 못한 채 살아간다. ‘사치코’는 마야를 기다리며, 기다리는 시간을 견디기 위해 필사적으로 할 일을 찾아 나선다. 그런가 하면 ‘하야토’는 끈질긴 노력 끝에 증발한 린과 조우한다. 고객들이 불행할 때마다, 이치로는 휘청거린다. 어느 날, 그에게 의문의 소년이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