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설명

기존의 모든 통념을 전복시키는 기막힌 내용전개
왜 죽이는가? 왜 죽였는가?
이 두 가지 물음에 공연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

<돈키호테>를 소재로 한 희곡이지만 이야기는 <돈키호테>와 전혀 다르다. 이 작품에서 기존의 <돈키호테>에 대한 신념은 완전히 무너진다. 기사들은 너무나 멀쩡하게 제정신이고, 정의로움은 개념조차 사라졌다. 이들의 행동에는 이유가 없다. 게다가 인생의 거의 막바지에 도달한 노인들인데도 식욕과 성욕은 왕성하다. 종들은 주인들의 냉대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구속되어 두 기사를 따른다. 의사는 환자를 만들어서라도 돈을 벌려고 하고, 목사는 죽을 사람을 찾아 헤맨다. 과학도 종교도 더 이상 인간에게 이로울 게 없는 세상이다. 이와 같이 작가는 이 작품에서 서구의 문명과 정신세계를 가차없이 비웃고 있는 것이다. 이는 서구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인 일본사회에 대한 비판이기도 한데, 같은 동양권에 속한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시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단순한 비판에 그치지 않는다. 등장인물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깊은 연민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베쓰야쿠 작품이 갖는 매력인 것이다. 두 기사는 마지막 순간까지 죽이지 않으면 죽게 되는 세상을 살아왔다. 이제 죽이는 것도 지쳤다고 말하는 이들에게서 말할 수 없는 피로함을 느낀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겪는 피로함 이기도 하다.


줄거리

400년 만에 다시 나타난 돈키호테
전혀 위험해 보이지 않는 두 명의 노기사의 등장으로
조용하던 그곳은 긴장에 휩싸인다.

거칠고 삭막한 황야에 서있는 이동식 숙박업소에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들이 살아남기 위해 모여든다.
서로를 증오하면서 서로를 의지할 수 밖에 없는, 발가벗겨진 인간의 모습.
유머와 잔혹함이 뒤섞인 드라마 속에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가 있다.

누더기를 걸치고 힘없이 등장한 두 노기사의 행동은 예상을 뒤엎는다.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고 잔인한 수법으로 사람들을 죽인다.
기사들의 행동에 이유는 없다. 단지'죽이지 않으면 죽게 된다'는
생존의 법칙만이 이들을 지배하고 있을 뿐.

인생의 막바지에 이른 두 기사는 죽음을 선택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다.
기도하듯 앉아서 '지구의 움직임'을 느끼는 노인들
두 명의 기사가 마치 한 사람처럼 겹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