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설명
스님들이 외출을 금하고 수행하는 기간을 안거라 하며, 이는 여름 3개월 동안 행하는 하안거(夏安居)와 겨울 3개월 동안 행하는 동안거(冬安居)가 있다. 즉 스님들은 1년에 두 번 안거를 행하게 된다.
치열하게 수행하는 선방 옆에는 지대방이 있다. 지대방은 수행 틈틈이 쉬는 휴게실과 같은 곳이다.
우리도 스님들처럼 치열하게 깨달음의 목적은 아니지만, 자기만의 치열한 삶의 공간이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사무실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가게이고, 어떤 사람한테는 공장이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산, 들, 바다 일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스님들처럼 마음과 몸이 편안히 열리는 지대방과 같은 공간을 갖고 있지 않을까? 그런 공간이 옆에 있는데도 못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작품은 스님들이 생활하는 <지대방>이라는 공간을 통해, 우리가 치열하게 생활하는 삶의 터전 속에서 미처 느끼지 못하고 지나쳐 버리는 ‘자기만의 지대방’ 같은 공간과 또한 그 속에서 ‘함께하는 사람’들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기회를 갖게 할 것이다.
기획 의도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
자본과 기술의 발달로 우리는 자연친화적이기 보다 자연 파괴적으로 살아온 세기였다. 전쟁과 개발의 세기에 인간성을 뒷전으로 내몰고 경제와 합리성을 앞세워 빈익빈 부익부의 괴리현상을 부풀렸다. 그리고 그 죄 값을 지금 톡톡히 치르고 있다. 이상기후와 지구 온난화는 지구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생명 존중사상의 결여와 개발위주의 경제정책은 모든 가치를 전도시키고, 우리는 서로 경쟁에서 이겨야 살아남는다는 막다른 골목으로 우리 스스로를 몰고 간 것이다.
막장드라마가 유행하고 무자비한 정글의 법칙이 통용되는 막가파식 소비문화가 우리들의 심성을 좀먹고 있다. 선진국이라는 착취와 노예제도의 어두운 그림자로 생성된 부와 이익을 개발국들이 차지하지 못하게 '사다리 걷어차기'수법으로 온갖 방해공작을 하고 있다. 그런 세월 속에서 우리가 '자연인'으로 살기는 너무나 버겁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작은 것이 아름답다.', 느림의 미학' 등으로 자연의 순수 속에서 어지러운 세속을 정화시키려는 듯 여기 동화적, 잃어버린 고향에서 살 듯 살아가는 세계가 그려져 있다. 인간 본성의 '참 자아'를 찾아 고행하는 수행자들의 모습에서 상생과 생명존중의 세기로 돌아가는 단초를 잡아본다. 우리들의 문화는 그 동안 의 상처를 치유하는 이타적 세기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줄거리
산중의 어느 절.
겨울 안거 동안 허운, 돈조, 혜산 세 스님은 함께 생활한다.
아직은 여물지 않았지만 만만치 않은 뚝심을 보이는 돈조 스님. 늦깍이로 입문하였지만 구도의 치렬함으로, 선방에서는 물론 지대방에서 조차 긴장을 늦추지 못하는 혜산스님. 외길을 살면서도 넉넉하고 여유로운 허운 스님.
깨달음을 위해 자신과 처절한 사투를 벌이는 선방! 그 짬을 잠시 이용하여 스스로 마음을 잡는 지대방!
두 방을 오가는 스님들의 삶 또한 그들의 마음 씀씀이만큼 절묘하다.
빨래감을 두고 아웅다웅하고, 안거 해제 후의 계획을 말하며 티격태격하고, 심지어 안거 해제 기념 파티를 위해 솔차를 훔치려는 이질적인 합의를 이루기도 하며...
이런 때에 무문관에 들어가 6년 결사를 하던 도문 스님이 6년을 며칠 앞둔 채, 스스로 결사를 풀고 나온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청천벽력 같은 일이다. 소란스러워진 절에 도문 스님을 흠모 한다는 객승 우지 스님이 찾아와 한바탕 해프닝을 벌인다.
이윽고 도문 스님이 나오기로 한 날 ,수많은 대중들을 남겨둔 채 도문스님이 잠적한다. 무문관의 신화가 갑자기 사라는 것이다. 저마다의 불평이 자자하다. 크게 발심한 혜산 스님은 스스로 무문관에 들어가고
우지 스님은 도문 스님을 찾으러 길을 떠난다.
모두 떠난 밤, 허운 스님과 돈조 스님이 솔차를 두고 마주 앉는다.
똑똑똑, 지대방에 손님이 찾아왔다.
누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