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설명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용기다. 아주 기이하고 독특하고 불가해한 것들을 마주할 용기. 이런 면에서 인류가 비겁해진 결과, 삶에 끼친 피해가 얼마나 큰지 모른다. ‘환상’이라고 하는 경험, 이른바 ‘영적 세계’ 라는 것, 죽음 등과 같이 우리와 아주 가까운 것들이, 예사로 얼버무리는 사이에 우리 삶에서 모두 사라져버렸다. 그러는 사이 그런 것들을 느끼는 데 필요한 감각들은 모두 퇴화되고 만 것이다. 신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 릴케
상상력은 아무것도 없음에서 시작 할 수 없다. 상상력을 기초로 하는 문학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문학은 글로 쓰여 지기 이전에, 문장으로 규정되어지기 한참 전부터 이미 “다른 무언가”와 연결 되어있다. 그리고 그 다른 무언가를 찾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용기다.
극단 슈퍼마켓가계도는 “다른 무언가” 그러니까 아주 기이하고 독특하고 불가해한 것들을 마주하려고 한다. 진실과 거짓, 현실과 환상, 삶과 죽음이 뒤섞여 있는 곳, 그 현실과 꿈의 경계를 찾기 위해 우리는 문학작품을 읽는 방법, 다시 말해 “읽다”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공연예술을 통해 시도 할 것이다. 문장과 문장의 호소를 무대 위 이미지로 전할 수 있을까? ‘읽다’라는 행위에서만 느낄 수 있는 해석의 진실성을 무대 위에서도 전달 할 수 있을 것인가?
200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인 김연수의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은 지난 10년 동안 발표된 중/단편소설 중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이다. 문학으로서, 소설로서, 무엇보다 중/단편소설로서 가장 완벽하게 구성되어 있는 이 작품이야말로 ‘읽다’라는 행위의 변환가능성을 가장 크게 보여줄 것이며 또한 그 작품 안에 담겨있는 수많은 내러티브들은 우리를 ‘다른 무언가’로 확실하게 안내해 줄 것 이라고 믿는다.
문장이 굳게 입을 다무는 곳. 그 끊어진 자리에서 시작되는 꿈.
사라졌으나 우리와 아주 가까웠던 것들을 찾기 위해...
줄거리
시위 함성과 최루탄 연기가 길거리를 채우던 80년대의 어느 날, 연우의 평범한 일상이 산산조각 난다. 여자친구의 자살. 갑작스러운 죽음보다 연우를 당황케 했던 건 여자친구가 남긴 단 몇 줄짜리의 유서였다. 연인인 자신에게 단 한마디도 남기지 않은 그 유서를 보며 연우는 도무지 여자친구의 죽음을 납득할 수 없었다.
방에 틀어박혀 불면의 밤을 보내는 연우에게 위로가 되어준 것은 오로지 책이었다. 집에 있는 책을 모조리 읽어버린 후로, 매일매일 하루에 두 권씩 학교 도서관에 있는 연애소설을 읽어나가던 연우의 일상에 또 다시 균열이 찾아온다. 실수로 청구기호를 잘못 적어 빌리게 된 <왕오천축국전>의 대출카드에 여자친구의 대출기록이 적혀 있던 것이다. 대체 왜 여자친구가 죽기 며칠 전에 <왕오천축국전>을 읽은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던 연우는 책 읽기를 멈추고 자신과 여자친구 사이에 있었던 모든 일들을 보고서 쓰듯이 소설로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일 년 가까이 붙들고 있던 소설을 탈고하고 나서, 연우는 불현듯 히말라야로 떠나야겠다고 마음 먹는다. 산악부 선배의 도움으로 히말라야 원정대 선발을 위한 동계훈련에 참여한다. 마지막 동계훈련을 떠나기 직전, 연우는 자신이 쓴 소설을 <왕오천축국전>의 주석가 한서희 교수에게 보낸다.
원정대 선발에 탈락하여 절망에 빠진 연우에게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연우의 소설을 출간하고 싶다는 출판사 편집장의 편지였다. 연우는 자신의 원고를 되찾기 위해 출판사에 찾아갔다가 한교수를 만나게 된다. 그녀와의 대화, 그리고 이어진 술자리 소동까지 더해지며 연우는 한 교수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