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설명

“우리는 이따금 낯선 타인의 일상을 사건이라 부르곤 한다.”

1. 오래전 대학 학창시절, 내 젊음의 기억 속에 각인된 낯선 사건이 하나가 있었다. 내가 다니던 대학이 위치한 명륜동은 십 수 년째 ‘범죄 없는 마을’로 신문에까지 기사화되어 소개된 적이 있는 그런 곳이었다. 그런데 그 기사가 난지 얼마 안 되어 거짓말처럼 그 기록은 깨지고 말았다. '장 주네'라는 이름을 가진 어느 조그만 카페의 젊은 여주인이 살해된 것이다. 아, 장 주네라니... 왜 하필 도둑놈의 이름을!
2. 사실 난 과거 그 사건의 전모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다. 당시 젊은 대학생의 일상에서 카페라는 곳은 그야말로 객기와 치기의 필연적인 공간배경 쯤 되는 것이었으므로 내가 그 불운한 여주인을 본적이 있었는지, 아니면 그 조그마한 카페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있었는지 조차 기억할 수가 없다. 내게 있어서 카페는 어디까지나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였으니까... 그러나 누군지 모를 그 '젊은 여주인'의 죽음과 그것이 야기하는 상상력의 잔존물은 무수한 시간이 흐른 오늘날에도 나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 그때 이후로 내내... 이 작품의 기원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참고로 작품 제목 “3cm”는 내가 자주 다녔던 또 다른 작은 카페의 이름이었음을 밝혀둔다.
3. 화가와 바이올리니스트의 모티브는 또 다른 실제 상황에 근거한다. 이 부분에 있어서 가깝게 지내는 선배 교수의 젊은 날 에피소드를 정식으로(?) 차용했음을 고백한다. 단지 조각 전공의 남자 대학원생과 피아노를 전공하는 여대생의 실제 이야기를 빌어 설정을 바꾸었을 뿐이다. 선배 교수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들의 연애가 뜻하지 않은 어긋남과 이별로 귀결되었다는 게 나한텐 큰 매력으로 다가왔었다.
4. 서사의 차원에서 작품 제목 “3cm”는 어긋남과 그로 인한 필연적인 그리움의 거리를 상징한다. 어쩌면 산다는 건 그 자체가 그 어디로부턴가 지속적으로 되풀이되는 어긋남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언젠가 내가 확연히 기억하고 있는 나 자신으로부터의 어긋남, 내가 필연이라 믿고 있는 삶의 동기와 과정의 어긋남, 나와 타인과의 어긋남, 생각과 행동의 어긋남... 동시에 그 어긋남이 야기한 거리는 그리움의 고통이 내재하는 힘겨운 노력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줄거리

한때 촉망받던 화가였던 석현, 지금은 그림 그리는 일에 깊은 회의를 느낀 채, 그저 대학가의 어느 건물 지하에서 조그만 화실을 운영하며 지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젊은 바이올리니스트인 지연이 잠시 비를 피해 그의 화실에 찾아온다. 어딘지 모르게 당돌해 보이는 그녀의 태도에 적잖이 당황하는 석현. 그런 그에게 지연은 음악과 미술의 소통을 전제로 엉뚱한 제안을 하게 되고, 그날 이후 두 사람 사이에 운명과도 같은 일상이 개입된다.

캐릭터

석현 | 한때 잘 나가던 화가였으나 지금은 그림 그리는 일을 그만 둔 채 자신의 화실에서 소일 삼아 입시생인 경은을 가르치는 일과 책을 읽고 시를 쓰는 일을 하고 있다.

지연 | 오케스트라 바이올리니스트 출신으로 새로운 삶을 계획 중. 여름 날 갑자기 쏟아진 비를 피해 석현의 화실에 들어서면서 운명적인 시간을 맞게 된다.

경은 | 석현의 화실에서 그림 공부를 하는 입시생. 미술 애호가인 엄마 덕분에 석현에게서 미술 레슨을 받고 있다. 꿈과 불안 사이에서 톡톡 튀는 전형적인 10대.

도영 | 석현의 대학 시절 절친. 석현의 아픔과 고뇌까지 보듬어주는 속 깊은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