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설명

“이 작품은 안톤 체호프가 사할린 섬을 여행하고 돌아와 발표한 동명의 단편소설을 참고하여 만들어 낸 허구의 희곡임을 밝힌다.” - 고재귀 안톤 체호프의 희곡은 백여년이 지난 먼 타국의 이야기 임에도 여전히 지금 이 나라 이 시대에도 읽혀지고 있고, 공연되어지고 있다. 그것은 체호프가 희곡 속에서 인물들을 형상화함에 있어서 인간 본질의 문제를 직시했기 때문일 것이며, 사회와 문화가 다름에도 ‘인간의 삶’에 있어서 희곡에서 드러난 문제들이 지금의 우리에게 새로운 시험의 순간을 제공하기 때문일 것이다. 극단 그린피그는 이번에 이 안톤 체호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허나 그를 이야기 하는 방법은 그가 남긴 희곡을 통해서가 아닌, 그가 남긴 삶의 발자취를 기반으로 그의 삶을 재구성한 이 시대의 작가가 쓴 희곡에 의해서일 것이다. 작가들은 그가 남긴 작품과 결과물들을 통해서만 기억되고 있다. 안톤 체호프라는 작가 또한 그가 남긴 수많은 작품들을 통해서만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내기까지, 그것을 만들어내는 과정과 안톤 체호프라는 인물이 겪었을 고뇌와 인간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안톤 체호프가 살았던 19세기 말 러시아는 사회 구조가 붕괴되면서 이전까지의 가치관과 문화가 흔들리고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던 격변과 혼란의 시기였다. 그 혼란의 와중에, 안정된 사회였다면 보이지 않았을 인간들의 여러 이면들이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안톤 체호프는 그 혼란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바로 거기서 인간의 본질과 사회의 의미에 대해서 고민하였을 것이다. 삶에서나 글에서나, 지식인들이 성실하게 사회와 인간에 대한 고민을 수반하지 않는 사회는, 지식인이 스스로의 책임을 방기하는 사회일 것이다. ‘작가 자신의 이야기 같은데?’ 라는 의문에서 시작된 이 희곡은 결국 우리가 알고 있는 안톤 체호프의 작품을 넘어서서 ‘안톤 체호프’라는 인물에 대한 접근의 과정이며, 한 시대의 지식인과 격변하는 사회 속에서 인간이 가져야 할 본질적 자세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결국 이 접근의 과정과 결과물을 통해서 우리는 지금 이 시대 우리의 모습을 반추하고 다시 삶의 본질에 대한 고민을 되씹게 될 것이다.

줄거리

1) 체호프의 발자취

1890년 4월, 자신의 문학적 이름이 막 세상에 알려지기 시점에 안톤 체호프는 모든 문학 활동을 접어둔 채 유형지인 사할린 섬으로 여행을 떠난다.
시베리아 열차가 완성되어 있지 않은 그 시대에 결핵에 걸린 병든 몸으로 러시아의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 마차와 배를 이용해 사할린 섬으로 들어가는 여행은 무모한 모험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체호프는 3개월에 걸친 여행 끝에 사할린 섬에 도착하여 유형지의 실태를 상세하게 시찰한 다음 8개월 뒤인 12월에 해로를 통해서 모스크바로 돌아온다.
그리고 다음 해 사할린에서의 조사 활동에 대한 보고서인 <사할린 섬>을 집필한다.
이 시기, 체호프가 왜 이러한 여행을 강행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무렵 그가 발표한 작품을 두고 일부 비평가들은 뚜렷한 주의나 주장이 없으며 주제 의식이 치열하지 못하다고 비난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어쩌면 체호프에게 이 여행은 창작 방법론의 위기와 갈등을 타개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 여행 이후 체호프의 작품들은 이전과 다른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인간적인 연민과 우수를 놓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초기작들과 다르지 않으나, 희극적인 요소들은 점점 줄어들고, 주인공들의 대화 속에서 사회적인 문제나 실존적인 문제들에 대한 진지한 모습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극은 체호프가 사할린 섬을 여행하고 돌아온 이후 발표한 단편소설 <공포>를 바탕으로 소설 속 화자인 ‘나’를 ‘안톤 체호프’라 설정하여 새롭게 희곡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2) 시놉시스

안톤 체호프는 자신의 친구인 드미트리 페트로비치 실린의 집을 방문하게 된다. 실린은 페테르부르크에서 관료생활을 하다 직장을 그만두고 도시를 떠나 아내와 함께 멜리호보에서 시골농장을 경영하고 있다. 그의 아내 마리야 세르게예브나는 페테르부르크에서 잠시 배우생활을 했던 여자로 실린과 결혼하기 전부터 체홉과 알고 지내던 관계이다. 그녀는 무명배우 생활을 하던 중 실린의 끈질긴 구애를 받고 그와 결혼하였다.
체호프의 방문에 마리는 기쁨과 함께 알 수 없는 감정을 내비친다. 담소를 나누다 농장생활의 고단함에 대해 토로하는 마리. 그 하소연에는 남편에 대한 불만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잠시 후 실린의 집에 조시마 신부와 40인의 순교자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가브릴라 세베로프가 방문한다. 가브릴라는 실린의 집 하인으로 일하였으나 지나친 음주벽으로 쫓겨난 상태이다. 조시마 신부는 실린과 마리에게 그가 다시 이 집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해 달라 부탁하지만 마리는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목재상을 만나러 나갔던 실린이 돌아와 가브릴라를 다시금 하인으로 받아들인다. 마리는 남편의 결정에 실망이상의 상처를 받는다.
다음 날, 장에 나갔던 실린이 까쨔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온다. 기차에 실려 있던 호밀을 훔쳐 먹다 치도곤을 당하던 그녀를 딱하게 여기고 다시 데려왔다고 말하는 실린. 마리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다시 한 번 하녀로 받아줄 것을 부탁하는 까쨔를 앞에 두고 실린에게 불같이 화를 낸다. 정숙하지 못한 계집애를 하녀로 쓸 수 없다며 까쨔를 매몰차게 내 쫓는 마리. 실린은 까쨔를 다른 농장으로 데려가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거실에 남은 체호프와 마리. 마리는 사랑 없는 가정에 대해서, 자신의 마음을 외면했던 체호프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그 날 밤 체호프는 실린과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마리가 거실로 들어서자 자리에서 일어나는 실린. 자신은 내일 새벽 일찍 목재상을 만나러 나가야 하니 먼저 잠자리에 들겠다고 말하며 방으로 사라진다. 마리와 체호프는 거실에 남아 이야기를 나눈다. 체호프는 마리가 자신을 원하고 있다고 느끼지만 술기운을 핑계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오는데...

“나는 아마 태어나면서부터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할 놈이었던 모양입니다. 당신이 무언가를 이해한다면…… 그렇다면 당신에게 축하를 드리지요. 내 눈에는 사방이 컴컴해 보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