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세상 어디에도 없는 음악을 위하여, 뮤지컬 ‘광염소나타’
깊은 어둠에 잠긴 무대. 두 대의 피아노와 목재 책상이 붉은 핏빛 조명에 음산한 빛을 발한다. 시종일관 어둠에 갇힌 무대 위에서 흡사 유령처럼 부유하는 세 남자는 절제된 감정을 서서히 끌어올리며 끝을 알 수 없는 파멸로 나아간다. 예술가의 눈앞에서 일그러짐, 비틀림, 죽음 직전의 모든 고통들은 음표가 되고 놀라운 선율로 다시 태어나 세상에 없던 음악을 탄생시킨다. 온몸에 전율이 이는 완벽한 죽음의 선율. 과연 도덕을 초월해 악에 물들기 시작한 그의 음악은 끝까지 아름다울 수 있을까.
뮤지컬 ‘광염소나타’는 동명의 소설에서 모티브를 얻어 새롭게 각색된 작품으로 지난 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지원사업인 '창작산실' 뮤지컬 우수신작으로 선정돼 주목을 받았다. 작품에는 작곡가 J와 S, 교수 K라는 오직 세 인물만 등장한다. 젊은 작곡가 역에 각각 성두섭과 김경수, 저명한 클래식계 교수로 이선근이 캐스팅되면서 원작의 자극적인 소재와 함께 개막 전부터 관객의 큰 관심을 모았다.
소극장 장점 살린 배우들의 밀도 높은 연기
-불친절한 스토리텔링은 채웠지만 호불호 갈릴 듯
뮤지컬 ‘광염소나타’는 별다른 무대 전환 없이, 극히 적은 수의 배우들이 공포, 분노, 희열, 광기에 이르는 격렬한 감정변화를 통해 사건을 이끌어나간다. 대사와 대사 사이에는 여백이 많고, 감정 표현의 상당부분을 세밀한 연기로 드러낸다. 눈빛과 표정, 손의 떨림까지 연기하는 섬세함은 객석이 가까운 소극장 뮤지컬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음악이 중요한 소재이자 주제가 되는 뮤지컬이지만, 대사와 연기는 다분히 연극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여기에 서정적인 클래식 음악이 때때로 더해지면서 새로운 갈등이 등장하지 않는 서사 전체에서 극적인 효과를 살리는 역할을 했다.
주인공 J의 일기로 서사가 진행되다 보니 생략되는 부분이 있는 등 스토리텔링은 다소 불친절하다. ‘죽음-살인’의 반복적인 패턴 또한 객석의 분위기를 침잠하게 한다. 하지만 그 덕분에 일련의 사건들을 인물의 내면과 깊이 관련지어 상상해 볼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왜 J는 살인을 반복하는 것일까. 관객이 의문을 가지고 섬세한 감정 연기에 집중하면 할수록 서서히 인물이 느끼는 공포감이 객석에까지 전이된다.
다만 잔인한 살인 장면과 시체 유기, 방화와 같은 소재 자체가 주는 괴기스러움과 잔혹함은 객석의 호불호를 가를 수 있는 부분이다. 특히 작곡가 J가 음주운전으로 사람을 치고, 죽어가는 사람을 자루에 담아 관찰하거나, 보관한 시체를 열어보는 장면, 교수 K가 살인 대상자를 물색해 살인을 부추기는 장면 등은 표현이 지나치게 구체적이어서 일부 관객에게는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죽음’이나 ‘살인’이 단순히 사건의 전환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는 점은 오히려 작품을 흥미롭게 만드는 부분이기도 하다. 살인을 저지르는 과정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을 창작하는 과정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살인’이 단순히 ‘상대방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이 아닌, ‘내 예술을 완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스릴러 장르를 즐기는 관객이라면, 작곡을 완성하기 위해서 ‘누구라도 상관없는 희생양’이 필요하다며 선한 얼굴로 살인을 행하는 J에게서 섬뜩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성두섭-김경수-이선근, 대체 불가능한 목소리의 배합
단순한 갈등 구조나 스토리텔링이 아쉬운 데 비해, 세 인물을 연기한 세 배우의 조합은 대체 불가능한 만족감을 준다. 셋 다 음색과 발성, 분위기가 각각 달라 마치 의도한 것처럼 배우들 그 자체로 등장인물의 개성과 갈등 구조를 뚜렷하게 드러낸다. 성두섭은 본인이 가진 선한 느낌과 부드러운 음색을 살려 좋은 곡을 쓰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살인을 저지르면서도 죄책감에 갈등하는 작곡가 J를 표현했다. 작곡가 J의 친구이자 천재작곡가 S로 등장하는 김경수는 날카롭고 이지적인 분위기와 함께 내리꽂는 듯한 날카로운 고음을 가지고 있어 성두섭의 부드러운 음색과 함께 좋은 조합을 이뤄냈다.
특히 이 둘의 서로 다른 음색을 부드럽고 깊은 울림으로 감싸주며 넘버 전체에서 힘을 전달하는 이선근의 역할이 무엇보다 돋보였다. 대사에서는 느껴지지 않았던 풍성한 바리톤의 음색이 노래할 때 무대에서 폭발하는 듯한 깊은 울림을 주며 객석을 몰입시키는 힘이 있었다. 특히 넘버 ‘The murder’에서 살인을 종용하며 J를 몰아붙이는 부분은 작품 전체에서도 단연코 시선을 잡아끄는 명장면이었다.
현악삼중주, 섬뜩하게 아름다운 클래식 넘버
작곡가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만큼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클래식 넘버들은 이 작품의 큰 매력이다. 무대의 오른쪽에 함께 자리한 첼로, 바이올린, 피아노 연주자들의 생생한 연주로 넘버를 들을 수 있다. 연주자들은 단순히 뮤지컬 넘버를 연주한다기보다는 인물의 내면을 그대로 악기로 표현하는 듯했다. 특히 현악기의 저음이 주는 음산하고도 서정적인 느낌은 죄악에 물들어가는 주인공의 깊고 어두운 내면과 잘 어울려 작품의 색을 결정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J와 S가 함께 피아노를 연주하는 마지막 장면은 그간의 어둡고 무거웠던 분위기를 일순 바꾸어놓는 반전과도 같은 감동을 선사한다. 마치 천재를 시기하며 괴로워하는 작곡가라는 점에서 관객에게 모차르트와 살리에르의 관계를 연상시켰던 전반부 J와 S의 관계가 이 마지막 장면을 통해 크게 변모한다.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두 사람은 “음표는 내가 되고 쉼표는 네가 되어”라는 노랫말과 같이 대체될 수 없는 진실한 관계임을 깨닫게 된다. 이 장면에서 실제 배우들이 직접 피아노 연주를 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성두섭, 김경수 배우는 전문 연주자 못지않은 실력을 선보이며 관객들을 놀라게 했다.
작품 중에 교수 K는 “작곡가에게 곡을 못 쓰는 것보다 더 큰 죄는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예술을 창작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예술가들에게 중요한 일인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사람이 있어야 음악도 있다”는 작곡가 S의 목소리를 의미 있게 남겨 놓는다. 김동인의 소설 ‘광염소나타’가 예술가의 광기에 기꺼이 관용을 베푸는 듯한 주제의식을 보여주는 데 대한 일종의 반박인 셈이다. 예술이 진정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결국, 예술을 창작하고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들의 예술에 대한 열정과 따뜻한 인간애 때문이라는 것을 이 작품은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사진 제공_아시아브릿지컨텐츠
박세은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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