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Flashback.20] 잔혹 동화의 농밀함,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는 1926년 나치가 지배하는 독일, 대저택에서 벌어진 화재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저명한 심리학자 그라첸 박사는 화재사건으로 목숨을 잃는다. 그에게 입양된 네 명의 아이들은 사건의 기억을 모두 잃은 채 뿔뿔이 흩어진다.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 ‘메리 슈미트’는 아이들을 구하고 전신화상을 입은 채 홀연히 사라진다. 그리고 12년 후, 그라첸 박사의 비밀수첩이 맏이 ‘한스’에게 전해지며 비밀의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다.
‘서윤미 식’으로 승부한다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는 서윤미가 극작과 작곡, 연출을 도맡았다. 작품은 ‘파멜라 린던 트래버스’의 소설 ‘메리 포핀스’에 ‘블랙’을 입혀 색다르게 틀어놓는다. 소설 속 ‘메리’는 아이들의 소원을 들어주고,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마법사 유모다.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 속 유모 ‘메리’는 입양된 네 명의 아이들에게 엄마를 대신하는 천사 같은 존재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은밀한 비밀을 감추고 있다.
작품은 ‘심리추리스릴러’를 표방한다. 하지만 ‘심리 추리’와 ‘스릴러’의 경계는 초연과 재연 모두 여전히 모호하다. 한 발 한 발 진실에 다가서며 과거의 상처를 극복해 가는 네 남매의 모습은 차라리 ‘잔혹 동화’에 가깝다. 예측 불가능한 ‘추리’나 ‘스릴러’의 긴장감과 흡인력 대신, ‘알면서도 보게 되는’ 동화의 밀도와 스토리 구조를 매력적으로 풀어낸다.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는 서윤미 식 ‘뉘앙스’가 강력한 작품이다. 전반에 스며든 음울함과 유화처럼 짙게 부유하는 듯한 배우들의 모습은 뮤지컬 ‘삼천’에서도 엿볼 수 있는 한 단면이다. 커튼과 그림자를 활용한 오프닝은 간결하고 탐미적이다. 비주얼적 만족도를 높여준 것은 물론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의 서두를 열어젖히는 창구로서도 적절했다. 서윤미 식의 ‘뉘앙스’를 관객에게 드리우기에도 충분했다.
인상적인 것은 배우의 ‘오브제화’다. 네 명의 남매는 ‘한스’의 기억 속에서 혹은 현재 상황에서 서로를 ‘오브제화’한다. 예를 들어, 슬픔에 잠긴 ‘안나’의 모습은 푸른 조명 아래 ‘헤르만’의 조각이 된다. 네 명의 형제는 저마다 허락된 제한된 조명 프레임 안에서 같은 동작, 같은 감정으로 움직인다. 은밀한 움직임은 오랫동안 방치된 창백한 그림처럼 서늘한 인상을 준다.
음악은 서윤미 식 ‘뉘앙스’를 만드는 데에 큰 몫을 한다. 음악은 작품의 전반에 ‘검은 안개’처럼 매복돼 있다. 음울한 선율은 네 남매의 행복했던 시절에서 조차도 그 저변을 지배한다. ‘오르골’의 반짝이는 소리가 때로는 섬뜩한 느낌을 주듯, 무대와 객석에 파고들어 관객들의 감정을 결박하는 것이다. 작품은 강력하고 대중적인 멜로디 대신 ‘레치타티보’(대사를 말하듯이 노래하는 형식) 형식을 선택해 가사 전달력에 큰 비중을 뒀다. 하지만 비슷하게 흘러가는 뮤지컬 넘버는 큰 변곡점이 없어 좀처럼 긴장하지 않으면 집중을 놓칠 수도 있다.
초연과 가장 많이 달라진 것은 음악이다. 초연 당시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는 단 두 대의 피아노로만 편곡돼 깔끔하고 신비로운 선율을 들려줬다. 반면, 한정적인 악기 편성으로 터져 나오는 클라이맥스를 멜로디가 받쳐주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올해는 현악기, 기타, 베이스 등 다양한 악기가 더해져 한층 더 풍성해졌다. 서정적인 현악기 선율은 인물의 감정이 폭발하도록 길을 터주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간결한 편곡으로 배가된 서늘함이 다소 약해진 것은 아쉽다.
‘좁은 프레임 안에서 함께 움직이는 배우들’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에는 오브제화 된 배우들이 함께 손을 움직이고, 같이 의자에 발을 올리는 등 일체화된 동작이 많다. 때문에 배우들의 호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찰나의 호흡이 흐트러지면 관객의 눈도 함께 갈 곳을 잃는다.
젊은 배우들로 구성된 출연진은 음산한 작품과 달리 생기가 넘쳤다. 박한근은 그동안 뮤지컬 ‘모차르트 오페라 락’, ‘락 오브 에이지’ 등에서 동안 외모로 앳된 역할을 주로 맡았다. 이번 작품에서는 날카로우면서도 강직한 변호사 맏형으로 변신했다. 알콜중독자의 면모는 다소 약하게 드러났지만 형제들을 이끌어가는 카리스마는 배우 박한근의 또 다른 일면을 보여줬다. 극을 이끌어 가는 화자로서의 존재감도 뚜렷했다.
둘째 ‘헤르만’ 역의 윤소호는 한층 안정적인 연기와 노래로 무대에 섰다. 한 작품을 마무리할 때마다 성장하는 성실함이 기분 좋은 인상을 남겼다. ‘안나’ 역의 문진아는 소리, 연기, 움직임 모든 면에서 가장 믿을 만했다. 특히, ‘안나’의 비밀이 밝혀지는 장면에서 기민하고 첨예한 동작으로 극의 긴장감을 극대화했다. ‘요나스’ 역의 김도빈은 자칫 튈 수 있는 언어장애, 공황장애 연기를 극 속에 부드럽게 녹여냈다. 초반부는 차분하면서 귀여운 막내를, 후반부에는 진실의 무게에 무너져 내리는 모습에 힘을 실어 연기했다.
정지혜 기자 newstage@hanmail.net
사진_아시아브릿지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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