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르담 드 파리 - 공연 개요
작성일2006.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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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연개요
원작 : 비토르 위고
(Victor Hugo)
대본 : 뤽 플라몽동
(Luc Plamondon)
작곡 : 리샤르 코시앙뜨
(Richard Cocciante)
연출 : 질 마으
(Gilles Masheu)
예술감독 : 웨인 폭스
(Wayne Fowkes)
2.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배경이 되는 15세기 절대주의와 앙시앵레짐
백년전쟁은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의 국민국가 형성에 기본적인 틀을 제공하였다. 샤를 5세의 업적을 계승한 샤를 7세 시대에 관료제의 정비, 재정상의 여러 개혁(소금과 기타의 전매세, 소비세 설정), 예비군의 창설(1439∼45년의 기사군단과 49년의 국민군)등 발전을 이룩하였으며, 부유한 상층시민층과 상업자본가는 국왕과 정치상·재정상 밀접하게 제휴하여 성속봉건귀족을 억누르고 중용되었다.
루이 11세는 앙주·프로방스·부르고뉴·브르타뉴 등의 왕실 친족영지를 왕령으로 합병하고, 프랑스 국토를 통일하여 절대왕정의 길을 정비하였다. 이 무렵 르네상스문화가 꽃을 피워 루아르강 유역에는 화려한 성이 생기고, F. 라블레 등의 문학가도 나타났다. 그러나 정치 체제면에서는 유력한 제후의 자립성이 높아져 완전한 중앙집권을 이루지 못하였다. 경제면에서는 지대의 금납화가 추진되어 농민의 경제적 상승이나 자립화가 이루어지고 하급영주의 몰락과 신흥상인으로의 이행 등으로 영주의 권위가 떨어졌다.
이러한 사정을 배경으로 16세기 중반에는 종교개혁운동, 특히 칼뱅주의가 도시·농촌의 수공업자나 농민에게 전파되었고, 이어서 왕권을 보좌하는 가톨릭계 대귀족에게 불만을 품은 하급귀족층에 침투하였다. 프랑스 칼뱅파 신교도를 위그노라 하는데 위그노 귀족의 지도자는 부르봉가의 앙리 드 나바르(앙리 4세)였다. 구교도측에는 명문 기즈가(家) 등 유력한 대귀족들이 득세하여 양파의 항쟁이 격화되었다. 발루아왕조는 두 파에 대해 균형정책을 펴고 왕권의 부흥을 지향하였다.
그러나 두 파의 항쟁은 1562∼98년까지 몇 차례의 종교전쟁으로 발전하였으며 왕국의 통일과 질서안정을 최우선으로 하는 고등법원관료와 대상인들로 구성된 중간파 폴리티크파가 나타나 앙리 드 나바르와 제휴하였다. 앙리 드 나바르는 하급귀족과 농민의 지지를 획득하였으며, 1589년 앙리 3세 암살에 의한 발루아왕조의 단절을 계기로 구교로 개종, 앙리 4세로서 왕위에 올라 부르봉왕조를 열었다. 그리고 98년 낭트칙령에 의하여 양파의 타협을 성립시켜 왕국을 통일하였다.
부르봉왕조부터 프랑스는 절대왕정이 되고 이 시기부터 프랑스혁명까지를 앙시앵레짐(Ancien Rgime;구제도)시대라 한다. 앙리 4세는 삼부회를 소집하지 않고 권력집중·경제안정에 힘썼다. 1610년 앙리 4세가 암살되고 뒤를 이은 루이 13세의 재상 A.J. 리슐리외는 국내 통일을 방해하는 위그노를 억압하고 농민봉기를 진압하였으며 각지에 지방장관을 두어 중앙집권을 강화함과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네덜란드 상인의 세력을 축출하기 위하여 중상주의 정책을 펴서 절대왕정의 확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루이 14세 때는 재상 J. 마자랭이 왕권절대주의 강화에 힘써 부르봉왕조 확립에 노력하였다. 영국혁명에 자극받아 절대왕정 강화에 불만을 품고 있던 대귀족과 일부 시민계급이 48∼53년 파리고등법원의 간섭을 반대하고 왕권에 빼앗긴 종래의 특권과 독립을 회복하고자 일으킨 프롱드난을 진압하였다. 왕권을 제약하고 있던 삼부회는 1614년 이래 열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루이 14세가 친정을 시작하였을 때 절대왕정은 그 극에 달하였다. 화려한 베르사유궁정으로 상징되는 루이 14세의 치세는 프랑스의 황금시대라 불리웠으며 P. 코르네유·J. 라신·몰리에르 등 3대 극작가를 비롯하여 고전주의 문예나 바로크식 미술 등 문화의 발전도 뚜렷하였다.
루이 14세는 신흥관료 J.B. 콜베르를 재무장관에 등용하여 부국강병을 추구하였으며 1604년 동인도회사를 설립, 중상주의에 의한 대외진출을 추진시켰다. 한편 루이 14세는 에스파냐령 네덜란드에 상속권을 주장하고 군사를 보내어 프랑슈콩테 등을 차지하는 등 잦은 대외전쟁으로 재정 위기를 초래하였다. 봉건지대와 소작료 등 무거운 부담을 지게 된 농민과 길드규제에 대한 농촌공업중심지의 반란은 절대주의를 동요시켰으며, 콜베르가 죽은 뒤 낭트칙령의 폐지로 신교를 신봉하는 수공업자들이 다수 망명하자 상공업도 쇠퇴하였다.
1715년 그가 죽은 뒤 어린 루이 15세가 즉위하여 오를레앙공 필리프가 섭정을 하였는데 이 시기에는 농민경제의 상승이나 농촌공업의 발달을 토대로 아래로부터 자본주의가 차츰 성장하여 봉건경제는 쇠퇴해 갔다. 또 지폐 남발과 투기 등이 경제혼란과 재정문란을 일으켰으며, 30년대부터 절대주의체제는 급속히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18세기 후반이 되자 산업혁명을 맞은 영국의 급속한 발전에 비하여 프랑스의 후진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으며, 그와 같은 현상을 비판하는 J.J. 루소·볼테르·C.L. 몽테스키외·D. 디드로 등의 계몽사상가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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