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입덕작은 쓰릴미" 공연 마니아의 탄생
- 2017.03.24
- 김대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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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공연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전문가 뺨치는 안목을 지닌 공연 마니아들은 어떤 계기로 ‘마니아의 길’을 걷기 시작한 걸까? 그들을 공연의 매력에 푹 빠지게 만든 작품과 그 작품의 매력은 무엇인지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지난 17일부터 약 일주일 동안 플레이디비와 페이스북 ‘보고싶다’ 페이지를 통해 공연 마니아 259명이 설문에 참여했다. 공연계 동향을 정확히 진단할 만큼의 표본 수는 아니지만 초보 관객이 ‘입덕’(덕후, 즉 마니아의 길로 들어서는 것)하게 되는 요인들이 몇가지 유형으로 드러났다.
공연 마니아들이 자신의 ‘입덕작’으로 가장 많이 언급한 작품은 뮤지컬 <쓰릴 미>였다. 입덕작으로 거론된 92개 작품 중 18표를 얻은 <쓰릴 미>가 1위, 12표를 받은 <지킬앤하이드>가 2위, 11표를 받은 <모차르트>가 3위를 차지했다. 공동 4위는 10표를 받은 <헤드윅>과 <엘리자벳>이다. 이 외에도 <여신님이 보고 계셔>, <프랑켄슈타인>, <베어 더 뮤지컬>, <위키드>, <에드거 앨런 포>가 차례로 10위권에 들었는데 ‘입덕작’ 상위권은 모두 뮤지컬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입덕작 중 뮤지컬은 68개, 연극은 24개로 뮤지컬이 연극보다 약 3배 많았다. 공연장 규모로 분류하면 대극장(1,000석 이상) 작품이 39개, 중소극장 작품이 53개로 나뉘었다.
“공연의 매력요? 일단 배우에게 반했죠”
작품의 메시지에 공감, 위로 받기도
공연 마니아들은 자신이 처음으로 공연에 반하게 됐던 그 짜릿한 순간을 회상하며 그 때 느낀 감정들을 장문의 댓글로 남겼다. 작품에 반하게 되는 이유를 어느 한가지 요인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가장 우선 순위로 언급한 매력 요인을 살펴봤다. 먼저 배우의 매력에 반했다는 답변이 80건으로 가장 많았다. 작가가 부여한 배역의 성격이 주는 매력도 무시할 수 없지만 그 배우만의 연기력과 무대 위 아우라를 매력 요소로 언급하는 답변들이 많았다. “뮤지컬 <영웅>에서 정성화의 연기와 무대 장악력을 보고 한 눈에 반했어요”(hjh8**)
작품이 주는 메시지에 감동받았다는 답변은 63건으로 2위를 차지했다. 힘든 삶 속에서 우연히 공감되는 작품을 만났고 그 안에 담긴 위로의 메시지 덕분에 새로운 힘을 얻었다는 반응이다. “제 입덕작은 연극 <프라이드>입니다. 무너질 것 같이 너무 힘든 날 <프라이드>가 가진 위로와 용기의 메시지에 따뜻한 응원을 받고, 행복을 느꼈습니다.”(ssong17**), “당시 이런저런 일로 너무 힘든 상태였고 머릿속이 하루 종일 윙윙거려 어떤 일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갈까말까 고민하다가 간 <위키드> 공연장에서 현실의 모든 고민이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어요. 엄청난 위로였고 숨 쉴 틈이 되어준 공연이었죠.” (qkddmswl1**)
재관람을 부르는 '넘버'의 매력
온 몸으로 느끼는 생생한 현장감
입덕작으로 언급된 작품 중 약 70%가 뮤지컬이다보니 ‘넘버’를 입덕 이유로 꼽는 답변도 많았다. (47건) “제 입덕작은 <베어 더 뮤지컬> 입니다. 이 작품을 보고 난 뒤 넘버가 귀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유튜브에서 넘버를 계속 들어도 너무 좋아서 다시 공연장을 갔던 기억이 나네요.” (jhs101**) 중독성 있는 멜로디와 뜻 깊은 가사는 재관람을 부르는 중요한 요인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외에 공연 예술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현장감을 언급하는 답변도 42건 있었다. 쩌렁쩌렁 울리는 음악의 진동, 무대의 압도감, 공연장의 공기 등 TV나 모니터 화면이 아닌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생생함을 잊지 못하는 마니아들이 적지 않았다. “제 입덕작은 <오! 당신이 잠든 사이>예요. 스크린과는 달리 가까운 무대에서 생생하게 전해지는 배우들의 열기와 열정에 반했습니다.”(tanc**)
한편 입덕작으로 가장 많이 언급된 뮤지컬 <쓰릴 미>의 경우 매력요인을 한가지로 뚜렷하게 언급하지 않은 답변이 많아 위의 네 가지 분류로 넣기 어려웠다. 4년 전 <쓰릴 미>를 보고 공연 마니아가 됐다는 회사원 K씨를 만나 작품의 매력에 대해 물어봤다. 그녀는 배우들이 만들어내는 ‘밀도’를 매력으로 언급했다. “말로 설명하긴 어려울 수 있어요. 모든 감동이 정확히 설명 가능한 것은 아니니까요. 그래도 하나를 꼽자면 배우 두 명과 피아니스트 한 명, 이렇게 단 세 명이서 만들어내는 밀도있는 호흡이 가장 큰 매력요인 같아요. 페어별로 공연이 달라지는 재미도 크고 반전 있는 스토리도 놀라웠고요.”
대한민국에서 공연 덕후로 산다는 것은
"관람 욕구도 진화해요"
공연 관람을 지속적인 취미로 이어가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뒷받침은 필수조건이다. 만만치 않은 티켓 가격 때문. 자신을 10년차 공연 마니아로 소개한 30대 회사원 Y씨는 아직 부양 가족이 없고 연봉도 또래에 비해 적지 않은 편이라 경제적으로 여유롭다. 하지만 그도 공연 마니아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고 고백한다.
“주 1회 이상은 꼭 공연을 봐요. 주말 공연보다는 평일 공연이 티켓팅 경쟁이 덜 심하니까 평일에 공연 볼 때가 더 많은 것 같아요. 하지만 야근이나 외부 업체 미팅이 잡혀버리면 취소수수료를 내더라도 공연을 취소할 수 밖에 없어요. 이런 경우가 적지 않아요.” Y씨는 다음날에 느끼는 피로감도 평일 공연 관람의 부작용으로 꼽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공연 마니아의 삶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작품이 주는 위안 때문이라고. “문학작품도 좋긴 하지만 고도로 응축해 놓은 비유나 상징들이 마음에 잘 와 닿지 않는 경우가 많았어요. 하지만 뮤지컬은 대사 하나, 가사 한 소절이 직접적으로 저를 위로해주더라고요. 이직 후 적응이 힘들어서 한참 힘든 시기가 있었는데 <킹키부츠>에서 이런 내용의 대사를 들었어요. ‘멀리 왔더라도 괜찮아. 다시 돌아가면 돼.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이 대사에 용기를 얻어 이전 직장으로 돌아갔고 평온을 되찾았죠.”
10년 동안 공연을 즐겨 온 Y씨는 공연 관람의 욕구도 단계적으로 변화했다고 고백했다. “처음에는 공연이란 무엇인지 학습하듯이 봤는데 어느 순간부터 어떤 작품이 저랑 잘 맞을지 알아보게 됐어요. 그 때부터는 취향에 맞는 공연만 골라서 봤죠. 그런데 지금은 또 달라졌어요. 제 취향에 맞지 않는 공연이라도 모조리 섭렵해 보고싶어요. 범취향적으로 수집한달까요.”
1990년대 청소년기에 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를 보고 공연 마니아가 됐다는 A씨는 지금 공연 기획사에서 일하는 일명 ‘성공한 덕후’다. 좋아하는 취미를 생업으로 삼게 됐으니 부러움을 살 만도 하지만 A씨는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고 고백했다.
“첫 직장은 게임회사였어요. 한 한달 쯤 일했을 때였나요, 공연계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이직했고 지금 10년 넘게 공연 홍보 마케팅 분야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힘들었어요. 그 당시에는 객석 관리도 직접 해야 했기에 아침부터 심야까지 공연장에 붙어 살아야 했어요. 제가 홍보 맡은 작품 외에는 볼 시간이 아예 없더라고요. 공연이 좋아서 시작한 일이지만 공연에서 더 멀어진 셈이었죠.”
공연 일정과 홍보 스케쥴에 따라 쉬는 날이 일정치 않다는 점도 공연관계자들이 토로하는 고충 중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계에서 계속 일하게 되는 이유는 뭘까. A씨는 공연을 보고 나오는 관객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커튼콜 때 관객들이 기립박수 치면서 즐거워하고 홍조 띈 얼굴로 나오는 걸 보면 저도 참 기분이 좋아져요. 그런 밝은 표정을 보면 공연에 대해 품었던 첫사랑의 감정도 다시 떠오르고요. 사실 다른 업계에 잠깐 이직한 적도 있었는데 기왕 뭘 팔아야 한다면 감동 파는 일이 좋다는 생각이 들어서 돌아왔어요.”
글: 김대열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kmdae@interpark.com)
그래픽 : 정혜린(hyelin@interpa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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