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디푸스> 이 정통한 비극성에 숨이 막힌다.

무대는 비틀어져 있고, 세트는 위태롭게 서 있다. 물체와 그림자가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극장 안에 들어서면 고요 속에 날카로운 기운이 아슬하다.
재단법인으로 새롭게 나선 국립극단의 창단작, 연극 <오이디푸스>는 2,500년 전 소포클래스가 쓴 그리스 비극이다. 신탁에 두려워하던 아비가 아들을 버리고, 버려진 아들은 훗날 아비를 죽인 후 제 어미와 결혼해 살을 섞어 자식을 낳는다. 부모와 자식간의 천륜을 거스르는 끔찍한 인간사다.

고전 비극은 세상의 이치를 처절하게 비춰내는 우리 인간들이 등장하며, 그 인물들은 인류와 사회가 멸망하지 않는 한 결코 설득력을 잃지 않는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세상의 변화에 따라 습성은 달라지지만 본성은 결코 변하지 않는 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극 작품이 현대에 설득력을 잃는 광경을 종종 목격한다. 역사가 주는 무게에 지레 짓눌려 익지 않은 감상에 허우적거리거나, 섣부른 현대의 메스로 촘촘한 작품의 조직을 잘게 해체해 놓을 때가 그런 경우일 것이다.

그런 와중에 한태숙 연출, 국립극단의 <오이디푸스>는 실로 오랜만에 그리스 비극의 정수를 짙게 담아내고 있어 더욱 돋보인다.

무대 안은 온통 안정을 잃은 것들 뿐이다. 사방에 날카로운 모서리를 세운 뒤틀린 무대는 단이 높고 가파른 경사를 가져 시선을 불편하게 한다. 거대한 한쪽 벽면 굳게 솟은 수 십 개의 봉들에 역병에 시달리는 백성들은 매달리고 또 나가 떨어진다. 결코 두 눈으로 마주할 수 없는 치욕스러운 인간의 모습을 끊임없이 관찰하기도 한다.


<오이디푸스>는 대단히 충실하고 철저히 비극의 정석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이번 무대가 더욱 뛰어난 건, 탄탄한 기본으로 작품의 핵을 통찰해, 설득력 있는 신선한 방법으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데 있다.

오이디푸스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또 불안해 한다. 신탁, 아내의 위로, 신하의 첨언 모두에 흔들린다. 그간 왕의 신분으로 자신감에 오만이 더해져, 추락이 더없이 아득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번민에 휩싸인 평범한 한 인간으로서 비극적인 운명 속 자신의 한계를 비로소 깨달았을 때 그는 더욱 울부짖고야 만다.

이영란은 벽면을 타고 오르며 묵직한 분필을 깨 가며 백성들을 그려낸다. 공연 시작에서 끝까지 그들은 그려지고 지워지며 울음을 게워 낸다. 안무와 동시에 출연하고 있는 이경은이 온몸을 떨며 벽면을 따라 추락하며 솟은 봉들에 부딪힐 때마다 오이디푸스를 지배하고, 테베 시민을 지배하며 이 세상의 모든 것일 듯 한 보잘 것 없는 인간의 비극성에 소름이 돋는다. 비어서 더욱 큰 울림과 찌름으로 무대 가득 파장을 낳는 음악도 빼 놓을 수 없다.

배우가 구사하는 정확한 발음이 얼마나 중요한 부분인지 <오이디푸스>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오이디푸스 역의 이상직을 비롯, 정동환, 박정자, 서이숙 등 완벽한 딕션을 구사하는 배우들과 마주하니 귀가 맑고 깨끗해진다.

열을 대신하는 하나의 오브제, 수 만 마디의 말을 대신하는 하나의 움직임은 빈 무대를 더욱 가득 채운다. 무엇 하나 놓칠 수 없는 촘촘한 밀도로, 고전은 이렇게 현대에 살아 더 먼 미래로 나아갈 힘을 가지게 된다.

글: 황선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suna1@interpark.com)



[ⓒ플레이DB m.playdb.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